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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5

 

다음 날 아침!
의가의  앞쪽으로 보이는 천량산의 봉우리 사이로 붉은 기운을 띤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이른 시각에 이미 성수의가는 몹시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의가의 앞 광장에서 부터 해검교로 이르는 길에는 이십여대에 이르는 긴 마차의 행렬이 늘어서 있었고 의가의 하인들과 시비들은 부지런히 각 마차에 필요한 물품들을 의가의 창고에서 마차로 옮겨 싣고 있었다.

부산스러운 바깥의 동정에 전각에 딸린 방 하나의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작고 하얀 머리 하나가 쏙 튀어 나왔다. 뒤 이어 또 다른 하얀 머리 하나가 방금 전 나온 하얀 머리 위로 겹쳐지더니 이내 검고 부스스한 큰 머리 하나가 하얀 머리들 위로 불쑥 튀어 나왔다. 바로 백아와 호아, 그리고 설지가 바깥의 부산스러움에 잠을 깨어 무슨 일인가 싶어 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것이다. 그리고는 잠시 후 설지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앗! 늦었다. 늦었어!"

한 소리를 외친 설지가 방문을 쾅하고 닫더니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때쯤 교혜린은 손에 커다란 상자 하나를 챙겨들고 설지를 깨우기 위해 설지의 방 바로 앞에 당도해 방문을 열며 설지를 조용한 목소리로 불렀다.
"설지야! 일어났니? 일어났으면 어서 준비하거라."
"응! 응! 다 됐어. 다 됐어."

말을 마친 설지의 앞을 바라 본 교혜린은 설지의 앞에 놓인 물건들을 살펴 보더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서책과 말린 과일들이구나? 서책은 그렇다해도 말린 과일은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될텐데 쓸데없는 일을 했구나."
"아냐, 아냐, 이것들은 백아와 호아랑 나만 먹을거란 말이야."
"호호호, 그래 알겠다. 어서 나와서 씻고 출발 준비하렴."
"응! 응! 아참, 그런데 이것들은 어디다 실어야 해?"

설지는 말을 하면서 꺼내 놓은 서책들과 말린 과일이 담긴 주머니를 가리켰다.
"가주님이 타고 가시는 마차에 실으렴. 그럼 되지 않겠니?"
"아! 맞다. 그럼 되겠네. 나 씻으러 갔다 올께."

백아와 호아를 대동하고 부리나케 방문을 열고 우물가로 달려가는 설지를 바라보던 교혜린은 이내 옷장을 열고 설지에게 필요한 옷가지들과 그동안 의가내에서 설지가 자주 사용하던 물건들을 한데 모아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용히 설지의 물품들을 챙기던 교혜린의 동작이 멈출때 쯤 방 바깥에서는 요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지가 돌아오는 소리였는데 설지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달려갈 때 와는 달리 제법 정갈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설지를 뒤따라 온 것은 백아와 호와 외에도 당나귀 한마리가 더 있었다. 바로 밍밍이라는 이름을 가진 설지의 애마였다.

"응? 언니, 그 상자는 뭐야?"
"호호, 요녀석아. 네 옷가지랑 네가 쓰던 지필묵, 그리고 네가 자주 쓰던 물건들이란다."
"아! 맞다. 그런 것들도 챙겨야 하는구나. 헤헤헤"
"호호. 녀석도.. 다 씻었으면 얼른 저기 서책들과 말린 과일들을 마차로 가져 가거라. 가주님이 타실 마차는 의가 바로 앞에 있으니까 멀리 가지 않아도 될거야."
"응! 응! 알았어. 우차!"

설지가 가벼운 동작으로 방문 앞에 쌓여져 있는 서책들을 들어 올리자 제법 많이 쌓여 있던 서책들은 설지의 눈을 가릴 정도 까지 올라와 버렸다.
"앗, 너무 높아 안되겠다. 백아랑 호아도 한권씩 들어."
설지가 말을 하면서 서책 한권씩을 백아와 호아의 입에 물려 주고는 나머지 서책을 들고 비틀거리는 동작으로 의가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입에 서책 한권씩을 물고 있는 백아와 호아가 뒤 따랐고 맨 마지막에는 당나귀 밍밍이 그들을 따라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켜요, 비켜요."
뒤뚱거리며 의가의 정문 앞에 세워진 마차로 다가가던 설지의 눈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들어 왔다. 이미 대부분의 마차에 짐이 다 실렸고 출발 준비를 마친 마차를 둘러보며 서 있던 성수의가 전대 가주 나운영과 그의 부인이자 황제인 성화제의 누이 동생인 명화 공주는 서책을 잔뜩 들고 마차로 다가오는 설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띠며 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명화 공주의 손에는 옷처럼 보이는 것이 들려 있었다. 위태 위태한 발걸음으로 서책을 마차에 올려 놓은 설지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그래. 설지도 잘잤느냐?'
나운영의 물음에 설지는 귀여운 고갯짓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손에 들린 옷이 자신을 위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지의 의문 가득한 시선에 대답이라도 하듯 명화 공주는 손에 들고 있던 장포를 펼쳐서 설지에게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호호호. 요녀석, 눈치는 빨라 가지고, 이 할미가 설지의 중원 출도를 기념하기 위해서 장포 한벌을 지어 봤단다. 어떠냐? 예쁘지?"

말을 하면서 명화 공주는 펼쳐 들고 있던 장포를 설지에게 입혀 주었다. 하얀 색으로 된 장포는 설지의 무릎 아래 까지 내려오는 길이로 설지의 몸에 꼭 맞는 크기였다. 장포의 왼쪽 가슴 어림에는 둥근 흑색 바탕에 황금 색의 수실로 성수의가를 상징하는 표식인 두마리의 용이 태극천을 감싸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얀 경장 차림이었던 설지에게 입혀진 하얀 장포는 특이한 재료로 만들어진 듯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옷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자신에게 입혀진 장포가 신기한 듯  이리 저리 살펴보던 설지가 명화 공주를 향해 이렇게 말하자 잔잔한 미소로 설지를 보고 있던 명화 공주가 설지의 궁금함을 풀어주려는 듯 말을 받았다.
"호호, 그 장포는 내가 오라버니에게 말해서 구한 천삼자로 짠 것이란다. 어지간한 도검으로는 그 장포를 침범하지 못할게야."
"정말? 백아, 발톱."

도검불침이라는 말에 백아의 발톱을 이용해 시험해 보려던 설지에게 백아는 고개를 저으며 설지의 머리 속으로 의념을 전달했다. 묵묵히 백아의 말을 전해 듣고 있던 설지는 백아의 말이 끝나자 할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이거 백아 발톱에 못 견딘다고 하는데?"
명화 공주는 설지의 말에 잠시 당혹해 하는 것 같더니 이렇게 말했다.
"호호, 요녀석아. 중원에 백아와 호아가 또 있겠니?"
"없어? 없어? 응 그렇구나."

할머니와 백아를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 설지는 환하게 웃으며 할머니에게 안겨 들었다. 설지를 안은 명화 공주는 의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운영을 향해 말했다.
"상공, 식당으로 가시지요."
"그럽시다."
"응? 밥 먹고 가야해?"
"그럼, 요녀석아. 밥도 굶고 먼길을 갈려고 했더냐. 이 할미와 함께 아침은 먹고 가야지."

2010년 9월 26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4

4. 중원출행

소림 십팔나한과 녹림 이십사절객이 엽정의 이야기에 몰두해 가고 있을 무렵 조금 전의 나이 어린 산적이 불쑥 끼어들며 엽정에게 물어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관군까지 합류했으면 혈사교의 무리들이 빠져 나갈 틈은 없었겠군요."
"그렇지.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나도 알 수 없어. 왜냐하면 혈사교의 총단으로 들어간 것은 성수신의와 성수의가 식솔들 삼십명이 전부였거든."
"아니. 왜요? 관군들과 나머지 무림인들은요?"
"그게 말이야. 신의께서 의가의 일은 의가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같이 갔던 무림인들과 관군들에게는 혈사교 총단의 외곽 봉쇄를 맡겼기 때문이야. 그러니 성수의가 식솔들 외에는 혈사교 총단으로 들어가 본 이가 없었지."
"그럼 혈사교가 멸문한 것은 성수의가 때문이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그것도 딱 두시진만이었다. 두시진만에 혈사교주를 비롯한 혈사교의 주요 인물들이 모조리 단전을 파괴당한채 끌려 나오더군. 내가 직접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고 했을거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소림 십팔나한과 녹림 이십사절객이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을 그 시각 성수신의 나운학은 철무륵을 비롯하여 일성 도장과 혜명 대사, 그리고 장총관과 함께 자신의 서재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서재의 열린 창 너머에서는 설지가 뒷짐을 진채 땅바닥을 바라보며 오락가락 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는데 서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모두는 설지의 발걸음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서재의 문 앞 마루에서는 호아가 편안한 자세로 엎드려 설지와 설지의 뒤를 따라 함께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백아의 모습을 눈으로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다과를 챙겨들고 서재를 향해 오고 있던 교혜린이 이 모습을 발견하고 설지에게 말을 걸었다.
"설지야! 너 왜 그러고 있니?"
"응? 응! 응!"
설지의 엉뚱한 대답에 교혜린은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트리며 다시 설지에게 물었다.
"호호호! 얘는 뭐가 응응응이야. 지금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는거니?"
"응? 아! 헤헤헤.. 응, 교언니. 다른게 아니고 밍밍이 때문에 그래."
"밍밍이? 밍밍이가 왜?"
"그게 지금 밍밍이가 외출 금지 중이거든. 그런데 내일 내가 중원으로 가잖아. 그래서 밍밍이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지금 심각하게 고민 중이야."
"호호호! 밍밍이가 또 호아를 따라 술마시다 들킨 모양이로구나. 그게 무슨 고민이라고 그러니?"
"응? 그럼 교언니는 무슨 방법이 있어?"
"그럼 있지. 우리 성수의가의 귀여운 소가주께서 중원으로 처음 나가시는데 당연히 애마도 함께 가야하지 않겠니? 그러니 외출 금지령은 뒤로 미뤘다가 돌아와서 다시 내리면 되지 않겠니!"
" 아! 그렇구나. 헤헤헤. 언니 고마워."

교혜린의 말에 설지는 손뼉을 짝 치며 탄성을 뱉은 후 부리나케 마굿간을 향해 뛰어 가며 외쳤다.
'언니! 나 밍밍이 한테 가 볼께. 밍밍아! 밍밍아!"
설지가 뛰어가자 그때까지 느긋하게 엎드려 있던 호아가 어느새 일어나 설지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으며 그 곁에는 백아도 함께 하고 있었다. 소리치며 뛰어가는 설지와 두마리 작은 호랑이의 모습을 미소로 지켜보고 있던 교혜린은 다과상을 들고 서재의 문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의 안에서는 교혜린과 설지의 이런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참이었는데 설지가 마굿간으로 뛰어가고 교혜린이 안으로 들어오자 철무륵이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교혜린에게 말을 걸었다.

"교소저! 밍밍이라면 제놈이 한혈보마인줄로 알고 있는 그 영악한 당나귀를 말함이 아니오?"
"호호! 예. 철대협. 맞습니다. 설지가 무척 좋아하는 바로 그 당나귀가 바로 밍밍이랍니다."
교혜린의 대답을 듣자 철무륵은 괴소를 흘리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방안의 인물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크흐흐. 이번 의가의 중원 출행은 예전과 달리 무척 재미있을 것 같지 않소? 만년삼왕과 두마리의 천년마령호, 거기에다 당나귀 주제에 한혈보마로 착각하고 있는 밍밍이 까지 더해지니 이번 출행이 상당히 기대가 되오이다. 크하하!"

아닌게 아니라 철무륵의 말을 듣던 방안의 인물들도 모두 철무륵과 같은 생각인지 입가에 미소를 달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2010년 9월 12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3

 

목소리의 주인공인 철무륵은 자신의 검을 힘없이 아래로 늘어 뜨린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운학을 향해 의문의 말을 던졌다. 이에 나운학은 그저 얼굴 가득 담백한 미소를 떠 올린채 지나가듯 한마디를 툭 내 뱉었다.
"참 형님도 삼재 검법의 일초인 횡소천군을 여태껏 모르셨습니까?"
"뭐, 뭐라고? 횡소천군이라고?"

나운학의 말에 기가막힌듯한 표정으로 말을 곱씹던 철무륵의 표정이 조금씩 풀려가는가 싶더니 이내 장내가 떠나 가도록 커다란 대소를 터뜨리며 나운학에게 말을 이었다.
"크하하! 크하하하! 횡소천군이라고? 자네가 방금 펼친 그 초식이 횡소천군이라면 이 산적의 쓰잘데기 없는 칼질은 그야말로 삿대질에 불과할걸세. 암! 삿대질이지. 크하하!"

철무륵이 몹시 기분 좋은 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삿대질 운운하자 그만 계면쩍어진 나운학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뽑았던 검을 검초(칼집)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철무륵을 향해 공손한 자세로 포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형님! 제 대답이 만족스러우십니까?"
"그렇네. 만족하다 뿐인가, 차고 넘치는 대답을 들은 셈이지. 하하하!"

철무륵과 나운학이 비무를 마무리하는 담소를 주고 받고 있을 때 장내에는 기이한  열기가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길태세와 형산파의 식솔들, 그리고 취걸개 방융과 개방의 거지들은 한쪽에 조용히 서있는 삼십명의 성수의가 의원들을 힐끗거리며 몹시 놀란 중에도 잔뜩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들로 서로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방금 전의 상황을 되풀이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에 반해 성수의가 쪽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이 그저 차분한 기색으로 철무륵과 나운학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일단의 기마대가 장내를 향해 서서히 다가서고 있는 모습이 중인들의 이목을 사로 잡았다. 삼청산 계곡으로 향하는 진입로를 따라 군막이 쳐진 곳으로 느리게 달려오고 있는 기마대는 기치창검을 앞세운 관병임을 멀리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수가 무려 일만기에 달할 정도의 대군이 몰려 오고 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막강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장내로 진군하던 기마대에서 일단의 기마가 툭 튀어나오는 것 같더니 군막 앞으로 달려 왔다.

거대한 깃발을 앞세운 일단의 기마가 가까이 다가서자 중인들은 그제서야 깃발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깃발은 대정국의 대장군임을 표시하는 깃발이었다. 현 대정국 황제인 성화제의 최측근이자 충신인 대장군 교남천을 상징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대형 깃발을 앞세운 기마대는 장내로 서서히 달려오다 성수신의 나운학을 발견하고 그의 지척까지 달려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운후 한꺼번에 우르르 하마했다.
 
대장군 교남천과 휘하 장수들로 이루어진 오십여명의 장병들은 말에서 내린 후 재빨리 대장군 교남천을 선두로 하여 쇄기 꼴 대형으로 진용을 갖추고 대장군의 걸음을 따르기 시작했다. 대장군 교남천은 나운학의 앞에 이르자 포권지례로 예를 먼저 취한 후에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정국의 대장군 교남천이오이다. 성수신의가 맞으신지?"
"예. 대장군. 제가 새로 성수신의 자리를 물려받은 나운학입니다. 하온데 어찌 대장군 께서 친히 대군을 이끌고 이 먼곳까지 출병하신 것이온지요?"
"하하! 저야 성상께서 하명하신 바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성상께서 이번 성수신의 참살 사건에 대해서 들으시고는 격노하시어 직접 출병하시겠다는 것을 소장이 대신 출병하겠다고 간곡히 주청을 드려 겨우 윤허를 받아 이렇게 오게 되었지요. 하하하!"
"그러셨군요. 성수의가의 일로 공연히 대장군께 폐만 끼치는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무슨 말씀을, 성상께옵서 이번 성수의가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한치의 실수도 없이 무조건 협조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관군들이 해야할 일을 알려 주시면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오십대의 대장군 교남천이 형형한 눈빛으로 사위를 압도하며 당당한 기세로 나운학에게 자신들이 달려온 목적을 이야기 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장내의 무림인들은 일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느닷없이 대장군이 대군을 몰고 와 성수의가를 돕겠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관과 무림은 기본적으로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버젓이 존재하는 바에야 대장군의 이런 행동이 쉽게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림인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성수신의 나운학의 태도였다. 관의 개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 하는 태도의 나운학을 바라보는 무림인들의 가슴 속에는 의문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이런 중인들의 궁금함을 풀어 주려는 듯 철무륵이 한걸음 나서 대장군을 일별한 후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나운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우! 이게무슨일인가? 갑자기 관병이라니?"
"아! 예. 형님. 모르셨나 보군요. 저희 어머님이 성상의 누이되시는 명화 공주이십니다."
 
충격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동안 감춰져 왔던 성수의가의 내력 중에서 또 하나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성수신의 나운학의 외숙이 당금 대정국의 황제인 성화제라는 소리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제서야 장내의 무림인들은 이 모든 상황이 재빠르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왜 황제가 직접 출병하겠다며 격노했던 것인지, 왜 대장군과 관군들에게 성수의가에 적극 협조하라는 황명을 내린 것이지를 말이다. 아울러 혈사교는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한순간에 장내의 있는 모든 무림인들의 머리 속을 스치고 있었다.

2010년 9월 5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2

 

철무륵이 자신의 삼장 정도 앞에 와서 우뚝 멈춰서자 나운학은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어 정식으로 비무를 청했다.
"성수신의 나운학이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 대협께 한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말을 하면서 깊숙한 포권지례로 비무 요청의 예를 표한 나운학이 자신의 왼손에 들려있던 한자루 청강검의 검파(칼자루)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움켜 쥐고 검초(칼집)에서 검을 빼 자신의 가슴어림께에서 약간 비스듬히 앞으로 기울여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런 나운학의 모습을 일별한 철무륵도 한마디 말로 비무에 응할 것임을 표한 후 자신도 지니고 있던 검의 검초에서 검을 빼 가볍게 자신의 허리 아래로 늘어 뜨렸다.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 성수신의 나운학의 비무 요청을 승락하는 바요."

그러나 검을 빼서 허리 아래로 늘어 뜨리고 있는 철무륵의 심정은 결코 편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쩔수 없이 비무에 응하기는 했으나 결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나운학이었기에 괜히 아끼는 의동생의 마음이 이번 비무로 다치게 될까 저어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운학은 그런 철무륵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빼들고 있던 검의 검신을 곧추세우는 동시에 기세를 발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여태까지 온화한 서생 같던 나운학의 기도가 갑자기 일변하는 것 같더니 관전하고 있던 장내의 모든 인물들에게 까지 그 막대한 기세의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지기 시작했다.

일변한 나운학의 기세를 처음으로 접한 철무륵은 잠시 멈칫거리는 듯 하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얼굴에 띄며 잠시 고개를 주억거린 후 허리 아래로 자연스레 내려뜨려 놓았던 자신의 검을 곧추세우며 자신도 모든 기세를 모아 자신의 검에 의지를 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장내에는 나운학이 지닌 기세와는 또 다른 거친 느낌의 기세가 장내를 장악하며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으하하! 운학 아우! 나를 이제까지 속이고 있었구만. 그런 기세라니, 내 오늘 큰 망신을 당한다 해도 그리 부끄럽지 않을것 같구먼. 그래."
"하하! 형님도 참, 속이다니요. 그저 오늘 까지는 그다지 무력을 사용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좋네, 좋아. 내 선공은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네."

철무륵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운학이 자신이 들고 있던 검에 내공을 주입하자 갑자기 검신 길이의 두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뿌연 검신 모양의 빛무리가 검봉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내의 인물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부르짖었다.
"거, 검강. 검강이다!"

성수신의가 검강을 발현할 정도의 내공과 무력을 지니고 있음을 장내의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었기에 나운학의 검봉에서 빠져나와 일렁이는 새하얀 빛의 검강을 바라보는 장내의 인물들은 경악성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나운학의 검강을 지켜보던 형산파 장문인 길태세도 경악을 발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고 다급히 주위 모두에게 소리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십장 이상은 떨어지도록 해라. 서둘러."

길장문인의 다급성을 접한 장내의 인물들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여 삽시간에 나운학과 철무륵의 주위 삼십장 이내에서 물러나 멀어져 갔다. 한편 주위의 인물들이 모두 물러서기 시작할 즈음 철무륵은 당황한 표정이 되어 나운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강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저 자신에 버금가는 기세를 발하기에 자신 보다 한수 정도 아래이거나 잘해야 동수일 것이라는 어림 짐작을 하고 있던 철무륵은 나운학의 검봉에서 일렁이는 검강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의 판단이 터무니 없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도 검강을 발현할 수 있으며 현 강호에도 몇명의 무인들이 검강을 발현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결단코 눈앞에 보이는 나운학의 검봉에서 빠져나와 찬란하게 빛나는 검강 만큼의 강기는 그 누구도 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저런 자연스러운 자세라니, 너무도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철무륵이 경악할 일은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무려 두자 이상의 너무도 선명한 검강을 발현하고 있는 나운학이 입을 떼어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검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내공이 소모됨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을 집중해야 함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었다. 그런데 나운학은 그런 무인들의 기본 상식을 보란듯이 무시하며 검강을 발현한 채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삼재검법이긴 하나 제법 매서울겁니다."
"뭐, 뭐라고, 사, 삼재검법이라고..."

기가막힐 일이었다. 무려 두자 이상의 검강을 발현하고써 고작 삼재 검법을 시전하겠다니... 허나, 이런 철무륵의 기막힘은 잠시 후에 이어진 나운학의 검세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나운학은 곧추세웠던 검신을 가로로 눕히더니 삼재검법의 일초식인 가로베기 횡소천군을 시전해 오고 있었는데 그런 나운학의 검을 바라보고 있는 철무륵의 시야에는 자신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나운학의 검봉에서 쏟아져 나온 검강이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을 향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짓쳐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심정은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도 매한가지였다. 하늘 가득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의 새하얀 검강이 나운학의 검봉에서 빠져 나와 마주 선 철무륵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은 기이한 장면을 목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해 무수히 날아오는 검강을 바라보던 철무륵은 어떻게 막아야할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한번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체념한 듯 새하얀 빛무리가 자신을 덥쳐오는 장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철무륵을 양단해 버릴 듯 무서운 기세로 철무륵을 향해 날아가던 검강들은 기묘하게도 철무륵을 그대로 지나쳐 철무륵이 서있는 뒷 쪽 공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수히 떨어져 내리는 검강과 부딪힌 땅 바닥은 엄청난 폭음을 토해내며 삽시간에 초토화가 되어 갔다. 검강과 요란한 폭음이 모두 사라지고 장내에 찾아 온 것은 정적과 뿌연 흙먼지였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흙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장내의 광경은 말 그대로 참혹지경이었다. 철무륵이 서 있는 뒷편의 모든 땅거죽이 뒤집힌 것은 물론 군데 군데 엄청난 크기의 웅덩이가 검강의 여파로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내에는 당혹한 목소리 하나가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언가?"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1

 

사경을 헤매던 설지는 만년삼왕의 도움으로 다음 날 아침부터 약간의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기력을 되찾기 시작하더니 놀라운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하여 만년 삼왕의 도움을 받은지 닷새만에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무거운 침묵속에 잠겨들었던 성수의가도 설지의 회복과 함께 깨어나기 시작하여 미뤄두었던 혈사교와의 담판을 위해 출행 준비에 들어갔다. 강서성 상요시의 삼청산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혈사교의 총단을 향해 성수의가의 가주 나운학과 성수의가 의원 삼십여명이 말 고삐를 쥐고 길을 나선 것은 설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지 사흘만이었다.

 

전격적이라고 말할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 성수의가의 출행 소식에 화들짝 놀란 개방과 녹림에서 부랴부랴 따라 붙었고 귀주성에서 강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호남성의 형산파에서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제자 오십여명을 하산시켜 성수의가의 행렬을 마중하게 하였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속에서 성수신의 나운학과 일행들이 삼청산의 초입에 당도한 것은 성수의가를 출발한지 열흘만의 일이었다.

 

이미 그곳에는 형산파 장문인 길태세를 비롯하여 제법 많은 군웅들이 운집하여 혈사교로 진입하는 길목을 완전히 차단한채 성수의가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성수신의 나운학과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을 선두로 한 일행은 형산파 장문인 길태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취걸개 방융과 철무륵 그리고 나운학과 길태세는 한꺼번에 오십여명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게 커다랗게 길가에 쳐진 군막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신의.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예. 장문인. 이리 반겨주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허허. 그 무슨 소리, 성수신의 께서 오시는데 당연히 제가 반겨드려야지요. 아! 그리고 총표파자께서도 그간 무고하셨소이까? 신수가 훤해지신 것 같소이다. 허허허."
"하하하. 이 산적이야 별탈이 있었겠습니까. 그나저나 길장문인께서는 또 다른 경지에 접어 드신 것 같소이다. 그려."
"허허허. 그리보아주시니 그저 얼굴을 들수 없을 지경이외다. 약간의 성취가 있어 그리 보이는게지요. 그래도 어디 총표파자에 비할 수 있겠소이까. 허허허. 취걸개 께서도 신수가 훤해지셨소이다.그려."
"쩝. 거지더러 신수가 훤해졌다니 그거 욕 아닙니까?"

 

덕담을 주고 받으며 인사를 나눈 길태세와 취걸개 그리고 철무륵은 잠시 서로의 눈길을 교환한 후 무언가 의중이 통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철무륵이 먼저 나운학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우. 이제까지 너무 급하게 달려오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데 그래 어쩔 생각인가?"
"어쩌다니요? 아버님의 명도 있고 하니 혈채를 받아야지요."
"아니, 아니, 내말은 그게 아니라, 혈채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혈사교가 그리 간단한 방파가 아니라네. 물론 우리 모두가 나선다면 무너뜨리지 못할것도 없겠지만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야. 좀더 시일을 두고 무림맹의 지원을 받아 혈사교를 치는 게 어떻겠는가?" 무림맹에서도 성수의가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할게 아닌가?"

 

철무륵의 말을 듣고 있던 길태세도 무거운 표정으로 동감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나운학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철무륵의 말이 끝나자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형님! 저하고 칼을 한번 섞어 보시겠습니까?"
이러한 나운학의 말에 철무륵은 잠시 멈칫거리다 나운학을 향해 깊숙한 눈길을 주더니 이렇게 말을 받았다.
"여보게. 아우! 내 자랑은 아니지만 이 산적의 칼은 제법 매섭다네. 자네가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줄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건 안되네."

 

철무륵이 이와 같은 대답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여태껏 철무륵은 나운학이 펼치는 무공을 직접 본적이 없었을 뿐더러 겉으로 드러나는 기운도 그저 평범한 의원 처럼 특이한 점이 없었기에 그저 일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운학은 철무륵의 심각한 거절의 의사에도 아랑곳 없이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형님! 지금 저하고 칼을 한번 나누어 보시지요. 그것으로 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나운학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 성큼 군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나운학의 모습을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철무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내젓더니 곧 나운학의 뒤를 따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철무륵이 바깥으로 나오자 이미 나운학은 청강검 한자루를 쥐고 군막 옆의 제법 넓직한 공터로 향하고 있었다.

 

나운학이 청강검 한자루를 쥐고 공터로 향하고 그 뒤를 따라 철무륵이 역시 손에 검을 쥔채 따라 나서자 곧 주위는 삽시간에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공터를 가운데 두고 약 백여명의 인물들이 빙둘러 서기 시작하였다. 비무가 진행되리라는 것을 짐작으로 깨달은 장내 인물들의 재빠른 행보였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본 철무륵은 혀를 끌끌 차더니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공터의 한가운데 서있는 나운학의 맞은 편에 가서 몸을 우뚝 세웠다.

2010년 8월 22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0

 

그날! 중원 천하로 하나의 소문이 개방도들의 입을 통해서 빠르게 번져 나갔다.
'혈사교의 무뢰배들이 성수신의 나운해를 피살하고 도주했다.'
이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들불 처럼 중원 전역으로 번져나갈 즈음 또 하나의 소문이 중원을 강타했다.
'성수의가의 신임 성수신의 나운학이 혈사교에 배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전대 성수신의 나운해의 피살에 관련있는 모든 자들의 수급을 들고 혈사교주가 직접 성수의가로 찾아와 무릎꿇고 사과하라.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시 혈사교를 무림에서 지워버리겠다.'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두가지 소문으로 중원 천하가 들끓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신임 성수신의가 보낸 배첩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였다. 아무리 성수의가라고 한들 한낱 의가에서 무림 거대 방파를 상대로 보내는 배첩의  내용이 너무도 엄청났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또 하나의 소문이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번 소문의 근원은 혈사교로 부터 시작되었는데 성수신의의 배첩을 개방으로 부터 전해받은 신임 혈사교주 곽대웅이 배첩을 한번 들여다 보고는 배첩을 갈기갈기 찢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미친 놈들.'

전대 혈사교주 기천륭을 암산하고 교를 빠져나간 그의 독자 기일성 까지 혈검대를 보내 주살해 버린 신임 혈사교주 곽대웅은 성수신의의 배첩을 받을 때 까지만 해도 그저 피식거리며 미친 놈들이라고 웃어 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혈사교주 곽대웅의 말이 호사가들의 입에서 퍼져 나가기 시작하자 상황은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정도맹의 의방에서 모든 의원들이 '이번 성수신의 피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자들이 처벌 받기 전에는 무림인들을 상대로 금창약 한줌 제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버린 것이었다. 뒤를 이어 사사천 소속의 의방 의원들과 마도맹 소속 의방 의원들이 같은 선언을 하며 동참했고 일반 의원들 역시 여기에 동참하며 무림인들을 상대로는 어떠한 의술도 베풀기를 거절하였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혈사교가 아니라 정도맹과 사사천 그리고 마도맹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무림을 삼분하고 있던 세개의 단체에서는 연일 회의가 벌어졌고 급기야 정도맹주와 사사천주 그리고 마도맹주가 한자리에 모여 장시간의 회의를 가진 끝에 한시적이지만 사상 초유로 정도와 사도 그리고 마도가 한자리에 모이는 무림맹 결성에 동의하게 되었다. 무림맹의 맹주는 세개 단체의 단체장들이 공동으로 맡기로 하고 성수의가와 혈사교 사이에 벌어지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중원 무림이 요동치고 있을 그때 정작 성수의가에서는 다른 문제로 의가 식솔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설지가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뒤 갑자기 신열이 들끓으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갈을 받은 나운학이 서둘러 달려와 설지의 상태를 안정시켜 놓았으나 헛소리를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며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서 간신히 버티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설지의 병세로 이날 부터 의가는 깊은 시름에 잠겨들었다.

이런 상황이 10여일 계속되자 그때 까지 설지 곁을 지키며 안절 부절 하지 못하던 호아가 조용히 성수의가를 빠져나가 두시진 정도 지난 후인 저녁 무렵에 돌아왔는데 그런 호아의 곁에는 어린 동자 하나가 함께 하고 있었다. 분명히 어린 동자의 모습이지만 어딘가 신비스러운 분의기가 있는 동자를 데리고 호아는 설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설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나운학에게 심령으로 동자의 정체를 알려주고는 설지를 동자에게 맡겨볼 것을 권하였다. 나운학은 동자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지의 곁에서 물러 나오며 동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어린 동자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운학을 한번 바라본 후 이내 누워있는 설지를 찬찬히 훓어보더니 작고 가녀린 설지의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방안의 공기 흐름이 변하는 것 같더니 온화한 기운이 손을 맞잡은 동자와 설지를 중심으로 방안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온화한 기운은 이내 방문을 넘어 조금씩 퍼져 나가더니 급기야는 의가 전체로 퍼져나가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때 의가의 식솔들도 갑자기 의가 전체로 퍼지는 온화한 기운을 느끼고는 서로를 쳐다보며 기운의 정체에 대해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서재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 나운영도 갑자기 의가로 퍼져나가는 신비롭고 온화한 기운을 느끼고는 그 근원을 찾기 위해 주변을 탐색하다 이내 설지의 방에서 기운이 흘러나옴을 깨닫고 서둘러 설지의 방으로 달려갔다.

설지의 방문 앞에 도착한 나운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묘하고 온화하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기운에 압도 당함을 느끼며 조용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 가득 의아함이 스며있는 나운영이 방으로 들어 오는 것을 발견한 나운학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로 예를 표하고는 나운영이 묻기도 전에 의문점을 곧 바로 풀어주었다.
"아! 아버님. 아무래도 저 어린 동자의 정체가 호아의 말로 짐작컨데 만년 삼왕인 것 같습니다. 호아가 의가를 빠져 나간 뒤 저 동자를 데리고 조금 전에 돌아와 제게 말하기를 자신들이 이렇게 영성을 갖게 된게 저 어린 동자 때문인데 사람들이 말하는 삼왕이라고 하는군요."

나운학의 말이 끝나자 얼굴 가득 의아함으로 물들어 있던 나운영의 얼굴에서는 조금씩 웃음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곧 이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밝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허허. 그래. 만년 삼왕이라고..., 자연지기의 결정체로 인간이 제어하지 못하는 존재로 알려진 만년삼왕이라니, 허허허 설지 놈에게 기연이 찾아온 것 같구나."
"예. 그렇습니다.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만년삼왕의 도움이 있다면 별로 어렵지 않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기연이랄 수 있겠지요."

부자가 흐뭇한 마음으로 도란 도란 말을 나눌 때 만년삼왕의 화신인 어린 동자는 잡고 있던 설지의 손을 놓고는 호아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듯 하더니 갑자기 설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린 동자의 모습이 흐릿해지며 작아지더니 어느새 설지의 앞가슴팍에 작은 삼 하나가 달려 있는 모습이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 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호아가 나운학에게 시선을 맞추며 심령으로 말을 전해왔다. 호아의 말을 전해들은 나운학은 이내 환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버지인 나운영에게 호아에게서 들은 말을 간추려 들려주었다.
"아버님. 호아의 말로는 만년삼왕의 도움으로 설지는 곧 괜찮아질거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만년삼왕도 자신들과 함께 설지의 곁에 머무르기로 했다며 아무 걱정말라고 하는군요."
"그래, 그래, 이제 되었다. 되었어."

2010년 8월 15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9


한편, 경황이 없는 와중에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나운영에게 수혈을 집혀 잠이 든 설지가 잠들기 전에 나운영에게 들려 주었던 자초지종에서 작은 호랑이가 혈사교의 무리들을 도륙했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운학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설지가 그때 까지도 손을 풀지 않고 작은 호랑이 한마리를 두손으로 꼭 안고 있는 것을 내려다 보았다.

때 마침 설지에게 안겨 있던 작은 호랑이도 초롱 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나운학의 시선을 따라 눈을 맞추며 깊숙한 시선으로 나운학과 눈을 맞추었다. 그렇게 시선을 맞춘 둘은 한순간 이채를 발하는가 싶더니 제법 긴 시간 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사실 지금 나운학은 작은 호랑이 백아와 눈을 맞추는 순간 자신의 머리 속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백아의 심령에 무척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성수의가에서 나고 자랐으나 영물과 심령상의 대화를 나눈다는 기사는 난생 처음 겪는지라 나운학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 동안 시선을 맞춘채 심령으로 전해지는 백아의 말을 모두 들은 나운학은 아들 부부의 시신을 바라 보며 침통해 하고 있는 나운영에게 천천히 다가가 백아와 나눈 심령상의 대화를 간추려 들려 주었다.

"음, 그러니까 설지의 품에 있는 백아와 저 호아가 그냥 아기 백호가 아니라 영물인게로구나?"
"예, 아버님. 아마도 천년마령호라고 사람들이 이름을 붙였던 바로 그 전설상의 존재 같습니다."
"설지의 부모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한다고?"
"예. 자기들도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쩔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대신 지금 부터는 설지를 자신들이 지켜봐 주겠다고 하는군요."
"허허. 어처구니 없이 부모를 잃은 설지가 복연을 만난 셈이군."

말을 하던 나운영은 두마리 백호에게 깊숙이 머리 숙여 예를 표하며 이렇게 이어 말했다.
"백공, 호공! 설지를 구해주셔서 고맙소. 그리고 설지를 잘 부탁하겠소. 아마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백공과 호공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 될테지만 이해해 주리라 믿소"
나운영이 이렇게 말하자 백아와 호아는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였다. 백아와 호아의 모습을 잠깐 바라 본 나운영은 문득 생각난 듯 아들인 운학에게 물어 보았다.
"운학아! 그런데 나에게는 백아와 호아의 심령이 전달되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글쎄요. 저도 거기 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운학의 말을 듣고 나서 무엇인가를 한참 생각하던 나운영은 결론을 내린 듯 이렇게 말했다.
"음. 전부터 백아와 호아가 설지와 쉽게 어울렸던 것을 보면 아마도 너와 설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성이 뛰어난 때문인 것 같구나. 오늘부터 백아와 호아는 우리 성수의가의 식솔이니 세심히 신경쓰거라."
"예. 아버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혈사교라는 그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에게 성수의가의 이름으로 배첩을 보내도록 하거라. 이번 일의 관련자들을 한놈도 빠트리지 말고 성수의가로 압송해 오라고 말이다. 만일 거절한다면 혈사교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거라."
단호하게 내뱉는 나운영의 음성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묻어 나와 주변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황상께도 이 일을 알려드려야 하니 귀주성의 성주에게 자세한 내막을 적은 배첩을 보내 황실로 보내도록 당부하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님."
"네 형 부부의 시신을 수습하고 의가로 돌아가도록 하자."
"예 아버님."

나운영과 나운학이 말을 마칠 즈음 두사람의 눈에는 새롭게 장내에 막 도착한 일단의 무리들이 서둘러 나운영 부자 앞으로 달려 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장대한 체격에 험상궂은 인상의 그 인물들은 한 눈에 척 보기에도 '나 산적!" 이라고 이마에 써 붙여 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를 풍기는 무리들이었다. 일행의 제일 앞에서 달려 오고 있는 인물은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여타의 산적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외부로 표출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현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이었다. 철무륵은 나운영 부자의 앞에서 이르자 포권지례를 하며 나운영에게 예를 갖춘후 황급히 나운영을 향해 입을 떼었다.
"아버님. 이게 어떻게 된 일 입니까? 운해 형님이 돌아가시다니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녹림의 총본산이 있는 천량산과 지척 지간에 있던 성수의가에서는 평소에 자주 녹림인들과 교류를 하며 지냈는데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약재를 채집하기 위해서 의가의 식솔들은 천량산을 자주 오르내려야 했고 그 과정에서 녹림인들과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성수신의 나운해도 약재 채집에 나선 의가 식솔들을 이끌고 자주 천량산을 오가다 자연스레 철무륵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보다 어리지만 호탕한 성품의 철무륵과 부드러운 성품의 나운해는 서로의 인품에 끌려 형님, 아우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부터 철무륵은 자주 성수의가에 들르기 시작했으며 격의없이 의가 식솔들에게 다가가 호탕한 성격으로 친분을 나누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부터인가는 나운영의 둘째 아들 처럼 의가 식솔들에게 대접받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철무륵이었기에 나운해의 피살 소식을 듣자마자 부하들을 이끌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 철무륵의 인사를 받은 나운영은 손에 들고 있던 혈패를 철무륵에게 건네주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무륵이 왔는가. 이게 무언지 알겠지? 혈사교 놈들이 운해를 살해하고 도주했네."

나운영은 아들인 나운해의 죽음을 입에 올릴때 마다 강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운영으로 부터 건네 받은 혈패의 앞뒤를 살펴 본 철무륵도 몸에서 자욱한 살기를 뿜어내며 스산한 음성으로 함께 온 일행들에게 명령했다.
"주위를 살피고 경계하도록!"
"예. 총표파자!"
철무륵의 말이 끝나자 이십팔명의 산적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철무륵은 그런 부하들을 일별한 후 나운영을 향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혈사교를 어떻게 하실겁니까? 지금이라도 제가 부하들을 이끌고 놈들을 추격해서 모두 잡아들일까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네. 운학이가 알아서 할거야. 자네는 운학이나 도와주도록 하게."
"그리고 운학이는 장내를 서둘러 정리하고 의가로 오도록해라. 아무래도 안사람이 걱정되어서 난 먼저 의가로 가봐야 겠다."
말을 마친 나운영은 서둘러 장내를 벗어나 의가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깨가 오늘따라 매우 무거워 보였다.

2010년 8월 8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8

 

3. 혈사교

나운영은 품에 안긴 설지의 수혈을 짚어 잠을 재우고는 나운학에게 물었다.
"운학아! 운해는 어떻게, 어떻게 되었느냐?"
"예. 아버님. 그, 그것이... 검에 의해 심장이 관통되어 절명하셨습니다."
"뭐라? 검이라고? 누가 감히 성수의가의 가주에게 검을 들이댔다는 말이더냐?"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하는 나운영의 음성에 담긴 비탄과 노기로 인해 무거운 분위기가 장내로 퍼져 나갈 쯤에 장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성수의가의 의원들이었다. 나운영은 숨을 깊이 한번 들이마신 뒤 장내에 도착한 의원들에게 일갈했다.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여 흉수가 남긴 흔적을 찾고 일부는 저기 있는 흑색 무복을 걸친 놈들의 시신을 뒤져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가져 오거라."
"예 어르신"
나운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수의가에서 달려나온 삼십여명의 의원들은 재빠르게 퍼져 나가며 주변을 수색하고 시신들의 몸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감히, 감히, 성수의가의 가주를 참살하다니 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의원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나운영의 읊조리는 음성에는 진한 살기마저 내포되어 있어 곁에 있던 하인 몇명이 순간 몸을 잔뜩 움츠리기까지 하였다.

빠르게 주변 정리를 하는 의원들의 손길이 마무리 될 즈음 장내에는 또 다시 일단의 무리가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남루한 차림의 복색을 걸친 거지들 십여명이었다. 그런 거지들의 선두에는 허리에 여섯개의 매듭으로 된 허리띠를 맨 건장한 체격의 중년 거지 하나가 있었다. 그는 바로 개방의 육결 제자인 취걸개 방융으로 개방의 장로와 후개를 제외하면 현 개방의 최고위층 인물인 동시에 개방주 팔선개 취타의 사제인 인물이었다.

귀주성의 귀양 개방 분타에 분타주로 와 있던 방융은 아침에 개방도가 잡아온 개 한마리를 끌고 성수의가 앞의 서강으로 분타 식구 대부분을 데리고 나와 있다가 소식을 전해 듣고는 황급히 개방의 식솔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길이었다. 개방의 육결 제자가 다른 곳도 아닌 귀양의 분타주로 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호에서 성수의가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반증인 셈이었다.

서둘러 달려 왔지만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방융은 장내를 한번 쓱 둘러보고는 함께 온 거지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더니 곧장 나운영에게 다가와 깊숙한 포권지례를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방융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방융의 인사를 받은 나운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인사를 받았다.
"어서오시게. 괜히 의가의 일로 자네들 까지 고생하는군."
"아닙니다. 어르신.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글쎄. 어떤 놈들인지 모르겠으나 저기 한쪽에 시신으로 누워 있는 붉은 장포를 걸친 젊은이가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쫓기는 것을 가주가 치료하고 도와준 모양일세. 그런데 저 젊은이를 쫓던 놈들이 추격해 와서는 다짜고짜 가주를 참살하고 설지 마저 없애려다 여기 두 마리 호랑이에게 대부분이 죽고 몇놈이 살아서 도망갔다고 하는군."

나운해 부부의 시신을 수습하고 나운영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을 듣고 있던 나운학의 안색은 나운영의 말이 진행될수록 굳어지는 것 같더니 나운영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잔뜩 얼굴을 굳힌채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토해냈다. 그런 나운학의 두 주먹은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져 있었다. 하늘을 보며 장탄식을 토해낸 나운학은 나운영의 품에 안긴채 잠들어 있는 설지를 측은한 듯 바라보더니 머리 칼을 쓰다듬어 주고는 나운영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아버님. 어떻게 할까요?"
"갚아줘야 되겠지. 허허, 삼백년 성수의가 역사 이래 내 대에 이르러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허허허, 내가 너무 오래 산게야. 암 그렇고 말고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나운영의 푸념 같은 읊조림이 끝날 때 쯤 해서 장내는 이미 정리가 마무리 되었고  흑색 무복을 걸친 시신들의 품에서 찾아낸 여러가지 물건들이 나운영의 발 아래 가지런히 놓이고 있었다. 품에서 나온 물건들은 대부분이 전낭들과 같이 별다른 특색이 없는 것들이었으나 붉은 칠을 한 손바닥 크기의 목패 열세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게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 붉은 목패의 앞면에는 검은 글씨로 혈자가 새겨져 있었고 뒷편에는 제작기 다른 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상체를 숙여 목패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든 나운영은 목패의 앞뒤를 찬찬히 살펴보다 곁의 방융에게 목패를 넘기며 물어 보았다. 방융의 손에 건네진 목패의 전면에는 혈자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십일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언지 아는가?"
"예. 어르신 이 패는 혈패라고 불리는 것으로 혈사교도를 증명하는 신패입니다."
"혈사교도라고?"
"예, 혈사교라고 무서운 기세로 세를 불려나가며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세를 확장한 방파인 혈사교의 교도임을 나타내는 패입니다. 혈사교는 스스로 혈사교라고는 하지만 광신도 집단은 아니고 단순히 교의 이름을 사용하는 무림방파이며 강서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강서성에 놈들의 본거지가 있다는겐가?"
"예 그렇습니다."

방융의 말을 들은 나운영은 한참을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침묵하더니 나운학을 돌아보며 불쑥 말을 뱉었다.
"운학아! 이제부터 네가 성수의가의 가주니라. 성수의가의 가주로 혈사교에 네 형의 목숨 값을 받아오거라. 내공 한줌없는 의원에게 그것도 성수의가 가주에게 살수를 펼친 놈을 비롯해서 혈사교의 교주와 이번 일에 관련 있는 놈들 모두에게 그 죗값을 물어야 할것이야."
"예. 아버님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성수의가의 가주 자리는 설지가 장성할 때 까지만 맡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말을 마친 나운학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운영은 아들의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후,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겠지. 네 마음대로 하거라."
"예. 아버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운학의 말이 끝나자 나운영은 설지를 나운학에게 넘겨주고 아들인 나운해 부부의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아들 부부의 시신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나운영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운학은 품에 안은 설지를 한번 내려다 보고는 방융에게 말했다.
"방분타주. 개방의 연락망을 좀 이용해야겠소이다. 도와주시겠소."
"허허. 그리하십시오. 성수의가의 가주께서 연락망이 필요하시다는데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소이까?"
"고맙소이다. 혈사교에 보내는 배첩을 부탁드리겠소이다."

나운학과 말을 나누면서도 방융은 사실 무척 곤혹스러웠다. 앞으로 이 일이 무림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사람들이 그저 의가로만 알고 있는 성수의가가 지닌 무력을 아니 곁에 서있는 신임 성수의가주가 지니고 있는 무력을 개방의 육결 제자이자 개방주의 사제인 자신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수의가를 건드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혈사교가 너무 늦지 않게 깨닫게 되기를 방융은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2010년 7월 25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7


주변의 산천초목들이 한꺼번에 부르르 떠는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작은 몸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포효를 내뱉은 호아는 좌우를 한번씩 돌아보다 이내 몸을 돌려 놀라서 주저 앉아 있는 설지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설지는 거의 혼절 지경에 이르러 있었는데 품에는 백아를 꼬옥 안고 바들 바들 떨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성수의가에서는 환단 제조를 위한 약수로 태극천을 흐르는 태극수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거의 매일 한차례씩 의원들이 의가의 하인들을 인솔하여 태극천과 성수의가를 오가고 있었다. 오늘도 물지게를 진 의가의 하인들과 그들을 인솔하고 있는 듯한 의원 차림의 장정이 태극천으로 오다 호아의 포효 소리에 깜짝 놀라 부리나케 일행들을 이끌고 태극천으로 다가 왔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참경에 일행은 할말을 잃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주저 앉아 있는 설지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시신들, 그리고 의가의 가주와 가모로 보이는 두 사람의 시신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의원 송염은 화들짝 놀라 제발 가주와 가모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시신쪽으로 다가가서 살펴 보았으나 기대와는 달리 그 두사람은 분명 의가의 가주와 가모였다.
"이, 이런일이... 가주님, 가모님!"

송염이 의원답지 않게 당황하며 두 사람을 흔들어 보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두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느껴지질 않았다. 잠시 허둥대던 송염은 이내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듯 긴 숨을 두어번 토해내고는 곧 바로 두 사람의 시신을 한쪽에 가지런히 모셔 놓고 급히 설지를 향하여 뛰어 갔다.
"설지야. 어디 다쳤느냐? 어디 좀 보자. 다친데는 없느냐?"

한꺼번에 여러 말을 토해낸 송염은 다급한 심정으로 주저 앉은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 설지를 일으켜 세워 조심스레 몸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이 없는듯 하자 이내 한숨을 쉬며 함께 온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누가 빨리 가서 이 사실을 의가에 알려라. 뭐하느냐 서두르지 않고!"
송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젊은 하인 하나가 지고 온 물지게를 내려 놓고 황급히 의가를 향하여 뛰어 갔다.

한편 참상이 벌어진 태극천에서 멀리 떨어진 성수의가에도 호아의 엄청난 포효 소리가 의가의 대문을 넘어 전해지며 의가의 전각들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호아의 포효 소리에 놀란 의가의 식솔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의 하늘을 향해 의문이 담긴 시선을 던지는 한편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 장남인 나운해에게 의가의 가주 자리를 물려주고 설지의 교육을 담당하며 소일하고 있던 전대 가주 나운영도 서재에 앉아 있다가 호아의 포효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느낌에 깜짝 놀라며 서재에서 황급히 나와 마당으로 내려 서고 있었다. 마당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 서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장총관의 모습도 보였다.
"장총관! 이게 무슨 소린가?"
"아! 예. 어르신. 글쎄 저도 잘모르겠습니다. 호랑이의 울음 소리 같기는 한데..."
"어느 쪽에서 들려온 소리든가?"
"예. 태극천 쪽에서 들려온 것 같습니다."
"태극천이라면 가주가 식솔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간 곳 아니든가?"
"예. 그, 그렇습니다."
"이런! 빨리 가보세. 따라오게."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느낌에 깜짝 놀랐던 나운영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이미 대문을 지나 태극천 방향으로 경공을 전개해 달려가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수신의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졌던 성수의가의 전대 가주 나운영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경악할만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대로 성수의가는 의술로 혁혁한 명성을 쌓아온 가문이며 특히 성수신의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죽은 자도 살려낸다는 신의 의술을 가진 의원을 대변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중원 천하에서는 이전까지 그 누구도 성수의가에 가전 무공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당연히 의원이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바꿔 말하면 중원에서 칼밥을 먹고사는 무림인 중에서 그 누구도 성수신의 나운영에게서 무공을 익힌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되니 이는 성수신의 나운영의 일신에 지닌 무공 수위가 그들을 앞선다는 의미와 다름아닌 것이다.

하여간 눈 깜짝할 사이에 성수교의 중간 쯤에 도착한 나운영은 다리의 저쪽 끝에서 의가 쪽으로 달려오는 인영 하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 인영의 앞으로 달려가 몸을 세운후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더냐?"
"예. 어르신. 그 그것이..."
"어허! 무슨 일이길래 이리 황급히 달려 오고 있던 게야. 어서 말해 보거라."
"예. 어르신. 그것이 가, 가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하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운영은 자신도 모르게 젊은 하인의 멱살을 틀어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질문을 했다.
"뭐, 뭐라고, 운해가, 운해가 죽었다고?"
"컥컥, 예. 어, 어르신 이것 좀 놓고..."
"어디냐, 어디 있느냐. 지금 운해는 어디 있느냐 말이다."
"예, 예 태극천에 있습..."
하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운영은 틀어쥐었던 멱살을 놓아주고 태극천 쪽을 향해 달려 가기 시작했다.

나운영이 태극천에 도착했을때 그의 눈에는 둘째 아들인 나운학이 먼저 도착하여 형님 내외의 시신을 살펴 보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나운학은 천량산으로 약초 채집을 나갔다가 태극천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던 중에 호아의 포효 소리를 듣고는 서둘러 내려와서 목불인견의 참상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나운학의 옆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설지가 품에 백아를 꼭 안은채 송염의 곁에 서 있는 모습이 나운영의 눈에 들어왔다.
"설지야! 이 놈, 설지야! 괜찮으냐?'

나운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설지는 이내 할아버지를 발견하고는 그쳤던 눈물을 다시 쏟아내며 곧바로 나운영에게 달려와 안겨 들었다.
"흑흑, 할아버지! 엄마와 아빠가...흑..으아앙!"
"그래. 그래. 이제, 이제는 괜찮다."
부드럽게 말을 하며 설지의 등을 쓸어주며 장내를 살펴보고 있는 나운영의 눈에서는 부드러운 말과 달리 서슬퍼런 귀화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2010년 7월 18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6


나운해는 기절해버린 사나이를 서둘러 자리 위로 끌어다 눕히고 사나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붉은 장포를 걸친 사나이는 그 강렬한 붉은 색으로 인해 멀리서 보기에는 나이가 제법 많이 든 것 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이제 겨우 약관을 지난 듯한 매우 젊은 사나이로 의식을 잃고 있었지만 오관이 반듯하고 고집이 세어 보이는 남자다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사나이의 등장에 놀라 달려왔던 설지는 아버지인 성수신의 나운해가 젊은 사나이를 살펴 보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다 나운해의 처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찍이 물러나 다시 두마리 아기 호랑이들과 뒤엉켜 놀기 시작하였다. 나운해는 그의 아내 염옥상의 도움을 받아 젊은 사내를 세밀히 진맥하다가 인상을 잔뜩 굳힌채로 말문을 열었다.

"흠. 여보! 이 청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독에 중독된 것 같소. 그리고 피를 너무 흘려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소."
그러나 제법 심각한 이 말을 들은 염옥상은 입가에 살풋 미소를 띄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손 쓰실수 있겠지요?"
"허허허. 그렇소.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는데 이 청년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것 같소. 어렵지만 내 최선을 다해 살려보리다."

나운해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자신의 품속에서 침통을 꺼내 놓고 청년의 겉옷을 모두 벗겨내었다. 그리고나서 머리 위의 백회혈을 시작으로 침을 시전하기 시작하여 신체의 중심 부위에 있는 명문혈까지 빠르게 침을 시전하였다. 어느 사이 청년의 상반신은 많은 침으로 인해 흡사 고슴도치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변하여 있었다. 침술 시전을 마치고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나운해는 침술을 시전할 때의 역순으로 빠르게 침을 회수하여 갈무리 하기 시작하였다.

상반신에 꽂혀 있던 모든 침을 회수하고 나자 그때부터 청년의 안색은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남들이 보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는 이 일련의 침술 시전은 성수의가 비전의 구명침술로 설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해도 한줄기 숨만 붙어 있으면 회생시킬 수 있는 침술로 생사귀혼 금침 대법이라고 불리는 침술 중 하나였다.

성수의가에서 직계들에게만 비전되어 내려오는 생사귀혼 금침 대법의 극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 해도 죽은지 한시진이 지나지 않았으면 일각 정도는 다시 숨이 돌아오게 하여 생전에 못다한 말을 남기게 할 수도 있는 아주 고절한 침술로 세인들에게는 신의 침술로 알려져 있었다. 침술 시전을 마치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긴 한숨과 함께 나운해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휴! 이제 신체 내부에 흩어져 있던 독은 모두 한곳으로 모아 안정을 시켰소. 보령환을 먹이고 나면 서서히 정신이 돌아올게요. 연후에 한곳으로 몰아 놓은 독을 해독하는 탕제를 먹이면 괜찮아 질게요."

말을 마친 나운해는 품속에 늘 지니고 다니던 성수보령환을 물에 으깨어 청년의 입속에 조금씩 흘려 넣어 주었다. 입 바깥으로 흘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보령환을 모두 먹인 나운해는 청년이 편안해 할 수 있게 자세를 잡아 자리에 눕혔다. 그렇게 모든 처치가 끝난 후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장내에 스무명 정도의 검은 무복 차림의 사내들이 날아 내렸다. 그렇게 날아 내린 사나이들의 선두에 서 있던 광폭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나운해와 염옥상을 일별한 후 눕혀져 있는 사나이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흐흐흐. 애송이 놈! 겨우 여기 까지 밖에 오지 못했더냐?  여기까지라도 도망쳐온 것을 가상하게 여겨 단번에 네 목을 잘라주마."

말을 마친 사내는 나운해가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검을 빼들고 짓쳐왔다. 그 같은 돌연한 행동에 놀란 나운해가 주춤하는 순간 갑자기 자신의 가슴 팍이 서늘해 지는 느낌에 고개를 내려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는 사이 검을 치켜든 사나이는 나운해를 베고 지나가면서 놀란 눈으로 비명을 지르며 남편을 바라보고 있던 염옥상 마저 가차 없이 베어 버리고는 눕혀져 있는 붉은 장포의 청년 곁으로 날아 내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흐흐흐. 애송이 소교주! 잘가시오."

그리고 이어지는 잔혹한 손속에 붉은 장포의 청년은 몸과 머리가 분리되고 말았다. 한편 한쪽에서 두마리 호랑이와 뒹굴고 있던 설지는 엄마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이전에 스무명 정도의 흉폭한 사내들이 장내에 날아 내릴때 부터 놀란 눈으로 지켜 보고 있다가 아빠와 엄마가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지자 그 자리에 굳어 버린듯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하고 놀란 눈을 끔벅거리며 그저 쓰러진 아빠와 엄마가 아무 일 없이 일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쓰러진 두사람은 잠시 꿈틀대는 듯 하더니 이내 잠잠해 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설지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악!"

설지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는 순간 장내에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검을 빼들고 설지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삭초제근이라는 말을 실행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러나 검을 빼들고 설지 쪽으로 걸어 오던 사나이는 자신의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른채 가슴이 함몰된 채 쓰러지고 말았다. 바로 두마리 아기 호랑이 중 호아가 설지의 눈 앞에서 사라지는 듯 하더니 어느순간 다가오는 사나이 앞에 불쑥 나타나 사나이의 가슴을 앞발로 후려쳤던 것이다.

장내에 있던 인물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란 일행들 가운데서 지휘자인듯 한 사나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주위의 동료들에게 말을 붙였다.
"저, 저게 무엇이냐?"
그러자 그 사나이들 중 하나의 입에서 대답이 튀어 나왔다.
"글쎄요. 호랑이 새끼 같은데..."
"야! 이 자식아. 무슨 놈의 호랑이 새끼가 저런 힘을 가지고 있어. 모두 공격해."

사나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은 무복의 사나이들 십여명이 일제히 검을 빼들고 호아를 둥그렇게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호아는 사나이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멀뚱히 사나이들을 쳐다 보다가 어느순간 한 사나이를 향해서 도약했다. 그때 부터 호아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이 진행되었다. 검은 무복의 사나이들은 강호에 나가면 그래도 일류소리를 듣는 무사였지만 천년마령호의 상대가 되기에는 애초에 무리가 있었다. 호아는 사나이들의 검을 요리 조리 피하며 한차례씩 사나이들의 가슴을 툭툭 치며 지나갔는데 그때마다 사나이들은 입으로 피분수를 날리며 무려 삼장 가까이나 뒤로 튕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의 지휘자를 비롯한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칠팔명 사내들의 얼굴 빛은 점점 하얗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가만히보니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검은 무복의 사나이들을 앞발로 쳐서 날려 버리고 있는 작은 호랑이는 눈앞에 있는 한마리가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작은 계집 아이의 품에 눈 앞에서 설치고 있는 호랑이와 똑 같은 모습의 작은 호랑이가 한마리가 더 있었던 것이다.

"으으. 도대체 저 놈들은 무엇이길래. 우리 혈사교의 전투대를 어린아이 가지고 놀듯 한다는 말이냐?"
"저, 통령. 그러고 보니 저기 죽어 나자빠진 사내의 가슴에 성수의가의 표시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저 꼬마 계집아이의 부모들로 성수의가의 식솔들인 듯 한데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하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다. 공연히 피해만 늘어날것 같군. 저 소교주의 시체도 처리해야 하는데 저 작은 호랑이의 기세로 봐서는 쉽지 않겠어."

통령이라고 불린 사나이가 말을 마치는 그 순간 호아를 공격했던 십여명의 사내들 중에서 마지막 사내가 피를 입으로 뿜으며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혈사교의 전투대라고 밝힌 사나이 십여명이 별다른 힘도 써보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 아니. 이럴수가. 안되겠다.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라. 귀양에서 모인다."

부리나케 말을 뱉은 통령이라는 사나이가 몸을 날리는 것을 시작으로 다행이 공격에 가담하지 않아 목숨을 건진 남은 사내들이 사방으로 몸을 날리며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들은 소교주라고 불린 사내의 시신을 비롯해 자신들의 동료들 시신들도 수습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면서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겨두게 되었다. 그것이 혈사교에 어떤 식으로 돌아가게 될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서...

한편 사나이들이 흩어져 도망가자 뒤를 쫓는 것을 포기한 호아는 분을 이기지 못한듯 작은 몸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엄청난 포효 소리를 토해냈다.
"크아앙!"

2010년 7월 17일 토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5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엽정의 이야기를 대략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았다.
마을의 유일한 광장과 접해있는 성수의가를 시작으로 작은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며 약 일천여호가 자리 잡고 있는 이 곳 묘족 마을은 사방이 높은 험산준봉으로 가로막혀 있고 마을을 드나드는 유일한 길은 마을 앞을 흐르는 서강으로 가로막혀 있어 외적의 침입이 어려운 천혜의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는 지형이었다.

이로인해 예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비경과 더불어 산비탈을 타고 안락하게 주저 앉은 묘족 마을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풍광으로 인근에 유명하다가 성수의가가 자리잡고 부터는 강호의 성역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묘족 마을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마을 앞 서강에 놓여 있는 유일한 다리인 성수교를 건너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위중한 상처를 입은 무림인들이 성수의가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마을로 들어오면서 공연한 시비를 만들지 않기 위해 마을 입구의 성수교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를 풀어 놓고 마을로 들어 오기 시작하면서 성수교는 해검교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무당의 해검지와 더불어 해검교는 강호의 이대 해검 지역이 된 것인데 당금에 이르러서는 무림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묘족 마을로 들어 오기 이전에 반드시 해검교에서 몸에 지니고 있는 병장기를 풀어 놓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풀어 놓은 병장기를 관리 하고 있는 것은 성수의가와 인접해 있으며 의가주인 나운학과 의형제로 맺어진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이 거주하고 있는 녹림 총본산에서 산적들이 내려와 무기를 관리함으로써 병장기 분실로 인한 불미스러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여 주고 있었다.

산적들에게 무기를 맡긴다는 것이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임은 당연한 것으로 당금 천하에서 성수의가와 녹림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성수의가의 가주는 대대로 성수신의라는 별호로 세인들에게 불리어지고 있었는데 성수의가의 당대 성수신의인 나운학에게는 형이 한사람 있었다. 삼년전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만해도 그의 형 나운해가 당대의 성수의가 가주이자 당대의 성수신의였었다.

삼년전 오월의 이맘때 성수신의 나운학은 아름다운 아내와 이제 막 여섯살이 된 어린 딸 설지와 함께 연잎으로 싼 밥과 반찬들을 챙겨 넣은 대나무로 엮은 가방을 들고 해검교를 건너 태극천으로 소풍을 나서고 있었다. 묘족 마을에서 해검교를 건너 관도를 따라 조금 걷다가 오른쪽으로  빠지는 오솔길로 접어 들어 한식경 정도 걸으면 너른 평지가 나오는데 그 평지 중앙에 태극 모양으로 땅이 내려 맞은 특이한 지형이 있었다.

거기에 어떻게 해서 그런 지형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태극 모양으로 내려 앉은 땅위로는 연중 한결 같은 양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태극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었다. 성수의가에서는 이 곳 태극천의 물을 길어다 환자 치료를 위한 성수의가 비전의 환단을 제조하고 있었는데 성수보령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환단의 약효가 소림의 소환단과 비교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하여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영단으로 소문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내와 딸을 데리고 태극천으로 소풍을 나온 나운학은 몇그루 나무가 서 있는 태극천이 바라다 보이는 한쪽 평지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벌써 부터 태극천 주위를 뛰어 다니는 딸 설지를 포근한 미소로 지켜 보다가 이내 아내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소풍의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한편 태극천 주위를 뛰어 다니며 신나게 놀던 설지는 다섯살 때 처음으로 태극천에서 마주친 두마리 아기 호랑이를 오늘도 변함없이 만나게 되었다.

온몸이 하얀 두마리 아기 호랑이는 오늘도 설지를 만나 반갑다는 듯 크르릉거리는 낮은 울음 소리를 토해내며 설지 주위를 뛰어 다녔다. 설지는 두마리 아기 호랑이를 만난 후 둘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두마리 중  덩치가 작은 놈에게는 백아라는 이름을 좀더 덩치가 큰 놈에게는 호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운해가 설지에게 왜 이름을 백아와 호아라고 지었냐고 물어보자 '둘다 백호잖아, 그러니 백아와 호아지'라는 대답이 나온 것은 다섯살 짜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설지는 물론이고 나운해 조차도 두마리 백호가 천년마령호인줄은 꿈에도 몰랐고 단순히 어미를 잃은 아기 백호들로 알고 있었다. 처음 아기 백호들과 같이 있는 딸을 발견한 나운해는 질겁을 하고 혹시 주변에 어미가 없는지 세심히 관찰하였으나 어디에서도 어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운해는 두마리 아기 백호들이 어미 몰래 태극천으로 내려 왔거나 어미을 잃어버린 아기 호랑이로만 알고 있었다.

나운해는 아기 백호들과 설지가 함께 노는 장면을 가끔 목격하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내버려 두었는데 설지와 아기 호랑이들의 인연은 그렇게 오늘 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만에 다시 만난 설지와 백호들은 신나게 어울려 뛰어 놀고 있었는데 어느순간 두마리 백호가 갑자기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쪽으로 시선을 주는 것이었다.

그때 설지의 눈에도 붉은색 장포를 걸친 사내 하나가 비틀거리며 장내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전신을 둘러싼 붉은 장포는 예리한 병장기에 군데 군데 찢어져 있었고 찢어진 틈 사이로는 언뜻 언뜻 피를 흘리는 상처 자국들이 보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장내로 들어서던 사내는 설지의 부모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운해 앞으로 걸어온 사내는 갑자기 풀썩 쓰러지며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내의 모습을 본 나운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부축하며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오."
그러나 이미 사내는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는지 나운해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2010년 7월 11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4


2. 산적들의 어떤 대화

"식사하세요!"
성수의가 주방의 보조 숙수중 하나인 왕삼이 한손에는 국자를 들고 한손으로는 징을 울려대며 커다랗게 외치는 모습에 눈길을 주던 설지는 이내 반색을 하며 호아와 백아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초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신나는 음성으로 이렇게 외쳤다.
"우와! 밥 시간이다. 호아, 백아 밥 먹으러 가자."

그러면서 설지는 초아를 향해 마치 끌어 안을듯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초아! 이리와."
그러자 초아라고 불린 까까머리에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던 소동자는 설지와 마찬가지로 양팔을 벌리며 설지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초아의 모습이 흐릿해 지며 줄어드는 듯 하더니 어느 순간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좀전에 교혜린이 설지의 앞 가슴에 달아준 들꽃 옆에 풀 뿌리 모양의 작은 삼이 하나 장신구 처럼 예쁘게 붙어 있었다.

"저, 저..."
설지와 초아의 이런 모습을 본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났다. 녹림에서 온 산적떼들은 자주 봐 왔다는 듯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그러려니 하는 인상들이었지만 소림사에서 온 무승들은 놀란 표정들이 얼굴에 확연히 떠오르고 있었다. 만년삼왕이라고 해서 특별한 능력이 있을 줄은 사전에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저렇게 작은 풀뿌리로 변해 설지의 가슴팍에 달라 붙을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승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초아를 갈무리 한 설지는 호아와 백아와 함께 요란하게 성수의가의 식당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생사대적을 눈앞에 둔듯이.... 우당탕 거리며 식당으로 달려 들어온 설지는 식당의 가운데 쯤에 마련된 탁자로 가서 의자 하나를 빼내고 거기에 앉기가 무섭게 주방을 향하여 외쳐 대기 시작했다.
"밥줘! 밥줘!"

뒤를 이어 장총관의 안내로 식당에 들어온 나운학을 비롯한 일행들이 설지의 좌우로 나눠 앉는 것과 동시에 주방으로 부터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왕삼을 필두로 주방의 일꾼들 손에 들려 나오는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랗고 둥그런 쟁반 위에는 밥과 함께 여러가지 정갈한 나물들을 중심으로 차려진 맛깔나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왕삼의 쟁반에 놓여 있는 커다란 구운 오리 두마리였다.

왕삼은 쟁반을 일행들, 특히 설지 쪽으로 들고 와서는 설지에게 먼저 밥과 반찬들을 내려 놓고 그 옆으로 구운 오리 한마리씩을 내려 놓았다. 이미 탁자 위로 올라와 점잖게 앉아 있던 두마리 백호의 앞에 놓여진 그 오리구이는 바로 호아와 백아를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일행들 모두의 앞에는 빠르게 밥과 반찬들이 내려 지고 있었으며 얼마지나지 않아 모두의 앞에 음식이 차려진 것을 확인한 나운학은 좌우를 돌아보며 식사를 권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들 드십시오."

나운학의 말이 끝나자 마자 한쪽에 있던 설지와 호아, 그리고 백아는 치열한 싸움에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생존을 위한 전쟁, 먹고 살아 남기 위한 전쟁을... 마치 전쟁터에 선 병사들과도 같은 치열한 설지와 호아, 백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미소를 그린 일행들도 그 모습에 동요된 듯 서둘러 전쟁에 참여하였고 짧은 시간에 전투는 마무리 되고 말았다.

식사 시간이 끝나자 성수의가의 식솔들은 내일 아침 출발할 성수의가의 하남출행에 대비해 짐을 꾸리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성수의가는 2년마다 한번씩 중원 각성 중 한 성을 방문해 환자들을 돌보는 동시에 각 지역 의원들간의 의술 교류를 위해 중원출행을 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그 순서가 하남성이었다. 매2년마다 행해지는 성수의가의 중원출행에는 언제부터인가 녹림의 식구들이 의가의 장비와 약재, 그리고 식자재를 비롯한 모든 필수품들의 운송을 책임지기 시작했고 소림에서는 무승들을 보내 의가의 식솔들에 대한 호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런 전통에 따라 올해 성수의가의 중원출행에 함께 나서게 된 녹림의 산적떼인 녹림 이십사절객과 소림의 무승들인 십팔나한은 출행 이전에 할일이 달리 없었기에 식사를 마친 후 포만감을 느끼며 의가의 담 한쪽에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나무의 시원한 그늘 아래 모여 쓸데없는 잡담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커다란 웃음 소리와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우며 즐거워 하던 산적떼 중에서 다른 산적들에 비해 조금 어려 보이는 산적 하나가 아까 설지와 인사를 나누었던 사내를 바라보며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엽대형!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어린 산적에게 엽대형이라고 불린 사내는 바로 녹림 이십사절객의 대형인 엽정으로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의 오른팔이자 의동생으로 철무륵이 가장 신임하는 사내였다. 지닌바 무공 수위가 철무륵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으며 철무륵과 함께 호탕하기로 유명한 녹림의 또 다른 호걸이었다.
"응? 뭐가 궁금한데? 마음 놓고 물어봐. 오늘 이 대형이 너희들의 궁금함을 시원하게 풀어주마. 하하하"
"예. 엽대형! 다른게 아니라 소공녀와 영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서요."
"하하하. 그렇구나. 우리 막내는 귀주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구나. 그래 그래. 내 알려주지."

호탕한 웃음 소리와 함께 장내를 둘러본 엽정은 산적들의 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소림의 십팔나한들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걸었다.
"스님들도 궁금하실테니 이리 오시구려. 불제자라고 해도 궁금한 것은 풀어야 할터, 이리 오셔서 우리와 함께 이야기 나눕시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한동안 동고동락 해야 할 처지이니."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아까 부터 이쪽으로 잔뜩 신경을 쓰고 있던 소림의 무승들은 엽정의 말에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 녹림 이십사절객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와 사이사이 끼어 앉기 시작하였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자리를 잡은 십팔나한과 녹림 이십사절객은 이제 엽정의 입을 향해 모두가 시선을 주며 그가 꺼집어 내어 놓을 이야기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말야..."

2010년 7월 4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3


산적 숙부 곁에 서서 혜명 대사와 산적 숙부 철무륵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설지는 낮은 백호의 울음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하여 뛰어 오는 백호의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와서 멈춰 선 백호를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호아야! 할아버지 모시고 왔어?"


설지의 말이 끝나자 호아라고 불린 작은 백호는 마치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아래 위로 두어번 끄덕이더니 대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따라 의가의 대문으로 향하던 설지의 눈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금새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막 의가를 들어서는 인물들에게로 달려 갔다.

"숙부님! 언니! 그리고 할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어딘지 모르게 뒤죽박죽인 듯한 설지의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인사에 장내에 있던 인물들이 모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거기에는 등에 커다란 자루를 둘러 멘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호남형의 사내 하나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함께 의가로 들어서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낡았지만 도복이 분명한 정갈한 옷차림의 늙수그레한 도사 한명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처마 아래에 서 있다가 소림의 혜명과 함께 녹림의 손님들을 맞고 있던 장촌관이 그 인영들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달려가 설지와 함께 일행을 맞아 들였다.
"가주님!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도 잘 다녀오셨지요?"
장총관과 설지의 인사를 받은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호남형의 사내는 설지를 번쩍 안아들더니 장총관을 향해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설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잘 놀고 있었느냐? 말썽 피우지는 않았고?"
"응! 숙부, 설지는 무지 무지 잘 놀았어."

설지를 안고 반가운 말을 나누는 이 호남형의 사내가 바로 당대 성수의가의 가주인 나운학 의원이었다. 강호에서는 의선, 신의, 대협 등의 여러 호칭으로 불리지만 나운학은 그저 의원으로 불리기를 좋아하며 소탈하고 범속한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나운학은 자신이 안고 있는 설지를 볼때 마다 늘 가슴아픈 기억이 떠올라 안타까웠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또한 나운학은 3년전 타계한 형님의 딸인 설지를 자신의 딸 처럼 키우면서 보살폈고 설지를 향해서는 늘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를 짓는 것 외에는 한번도 화를 낸적이 없을 정도로 애지중지 하며 설지의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 주고 있었다.

성수의가주 나운학의 곁에 있는 이십대의 아름다운 여인은 절세가인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의 미를 간직한 여인으로 강호상에서는 알려진 내력이 별로 없이 그저 성수의화 교혜린이라는 별호와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신세 내력에 대해서는 일체 알려지지 않은 신비화이자 무림 제일화였다. 교혜린은 나운학의 품에 안긴 설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섞인 듯한 시선과 안타까움이 어린 듯한 시선을 함께 보내다 설지에게 말을 건넸다.

"호호, 설지야! 잘 놀았니?"
"응! 언니 백아랑 초아랑 술레잡기 하면서 놀았어."
"호호 그랬구나. 자 이건 가주님과 약초를 채집하고 산에서 내려오다 예쁜 꽃이 피어 있길래 설지에게 주려고 가져 왔단다."
말을 하면서 교혜린은 꺾어온 작은 들꽃을 설지의 가슴팍에 꽂아 주었다.
교혜린이 달아주는 꽃을 바라보던 설지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더니 교혜린의 뺨에 입을 맞추며 좋아하였다.
"우와! 이거 무지 예쁘다. 언니 고마워!"

설지가 가슴팍에 달린 꽃을 내려다 보며 웃고 있는 그때였다.
가주 일행의 뒤에 서 있던 도사 차림의 늙은이가 설지에게 다가서며 심통이 난 듯한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녀석! 이 할애비는 빈 손이라고 무시하는거냐?"

도사의 말이 끝나자 설지는 도사를 향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흥, 도사 할아버지는 하는 일도 없이 매일 주루에서 술만 드시며 놀면서 설지에게 꽃 한번 꺾어준 적이 없잖아요!"
이 말을 들은 늙은 도사는 짐짓 나무라는 태도로 설지에게 말했다.
"아, 욘석아 그건 노는 게 아니라 도를 깨우치는 과정인게야. 흐흠!"

자신이 말해 놓고도 무언가 어색한지 끝에 가서는 어색한 기침소리로 말을 마무리 하는 이 도사가 바로 무당 검선이라고 강호에 알려져 있는 무당 제일 고수이자 무당 장문인 보다 한배분이 높은 일성 도장이었다. 무당의 태극 검법을 십이성 대성한 일성 도장은 무공만큼이나 기이한 행로로도 유명한데 도사의 신분으로 술을 즐겨 마시는 것은 물론 성품이 소탈하여 시정잡배들과도 어울려 술자리를 갖는 등 허례 허식을 몹시도 싫어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일성 도장 까지 성수의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으니 가히 성수의가가 중원제일가라고 불리우는 것이 그저 과장된 것임은 분명 아닌 셈이었다.

일성 도장은 주루에서 호아와 함께 술 한잔을 마시고 있다가 산을 내려 오는 나운학과 교혜린을 발견하고는 주루를 나서서 함께 의가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는데 그런 일성 도장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고 있던 설지는 갑자기 생각난 듯 곁에 다가와 있던 두마리 백호 중에서 약간 몸집이 커 보이는 백호의 양쪽 앞발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백호의 몸통을 들어 올리고 자신의 눈과 백호의 눈을 맞추더니 백호에게 말을 건넸다.
"호아! 너, 또 술 먹었지?"

설지의 이 말이 끝나자 호아라 불린 백호는 몸을 잠시 부르르 떠는 듯 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살레 살레 저었다.
"안마셨다고?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아~ 해봐."
그 소리에 호아는 작은 입을 떡 벌리더니 설지의 얼굴을 향해 입김을 불어냈다.
"이상한데? 분명 아까는 술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알았어, 술 마시면 안돼! 알았지?"

호아를 향해 말을 마친 설지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이상한데를 연발하고 있었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내의 인물들은 모두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조금 전에 설지에게 들어올려지기 직전에 호아는 주독을 모두 체외로 방출해 버렸으며 장내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아 차렸으나 그저 모른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지와 의가주 일행의 모습을 바라 보고 있던 철무륵은 그들간의 한바탕 인사가 끝나자 우렁 우렁한 큰 목소리로 나운학에게 말을 걸었다.
"하하하. 아우님, 산에 갔다 오시는가?"
"아! 예, 형님 오셨군요. 이번 의가의 하남성 행에 혹시라도 필요할지 모를 약초를 미리 구해 놓기 위해 아침 일찍 교소저와 함께 산에 올랐다가 이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하하, 그랬구만. 하긴 이 곳 귀주성 만큼 좋은 약초가 많이 나는 곳이 중원에는 없지."
"예. 그렇습니다. 형님. 많이 준비하긴 했으나 혹시라도 부족할까 싶어 좀더 채집하고 오는 길입니다."
"허허, 사람. 그 세심한 성격은 여전하구만."

철무륵과 나운학의 인사가 마무리 될 즈음 주방의 보조 숙수 하나가 마당 한켠에 있던 징을 힘차게 두들기며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의가의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알렸다.

2010년 6월 27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2



서로를 마주보며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십팔 나한들 중에서 대사형이며 수좌승인 공각이 사제들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혜명 대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계율 원주님!"
"응, 왜 그러시는가?"
"방금 말씀하신 것을 저희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요? 만년삼왕과 천년 영물이라니요?"
"허허허, 놀랐는가? 맞네 저기 지금 자네들 눈앞에서 소공녀와 놀아주고 있는 소동과 백호는 인세에 등장한 적이 없어 자세한 이력이 알려져 있지 않은 만년 삼왕과 천년 마령호일세."
"천년 마령호라 하심은..."
"그래, 그렇지! 자네들은 잘 모르겠군. 저기 고양이 처럼 보이는 작은 백호에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천년 마령호라 할 수 있겠지. 정확한 수령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만년 삼왕의 도움으로 거의 천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을 살아 왔을게야. 그리고 만년 삼왕은 자연지기를 머금으며 오랜 세월 살아왔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채집이 불가능한 영물이지. 천년 마령호와 만년 삼왕은 영성이 발달하여 인간을 아주 우스운 존재로 여긴다고 이곳 의가주께서 말씀 하시더군. 그런 영물들이 3년전의 그 사건때 소공녀와 영성이 통하여 저렇게 함께 지내게 된거야."

계율 원주인 혜명 대사의 말을 듣고 있던 십팔 나한들은 하나 같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은채 소공녀라 불린 어린 소녀와 영물들의 뜀박질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공녀와 영물들의 달음박질이 전하는 편안한 풍경과 함께 머리 위에 걸린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한낮의 느긋함이 길어지던 그때 성수의가의 대문을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성수의가의 마당으로 막 들어선 일단의 무리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체격과 우락 부락한 험한 인상으로 강렬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선두에 있던 장대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대소를 터트리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크하하하! 설지야. 산적 숙부왔다."
사내의 찌렁한 목소리가 성수의가의 마당을 커다랗게 울리자 달음박질 하고 있던 인영들의 동작이 일시에 멈추는가 싶더니 설지라고 불린 소공녀가 사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설지는 자신의 옆에 있던 백호를 달랑 들어 품에 안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우와! 산적 숙부!"
"그래 그래. 우리 귀여운 설지. 잘 있었느냐?"
"네. 숙부! 숙부도 잘 지내셨지요?"
고개를 숙이며 하는 설지의 말이 떨어지자 사내는 다시 한번 대소를 터트리더니 양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어디 오랜만에 우리 설지 한번 안아보자꾸나."

그 말을 들은 설지는 품에 안은 백호를 한번 내려다보고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백호를 뒤로 휙 던져버리고 산적 숙부라고 부른 사내에게 달려가 냉큼 안겨 버렸다. 한편 설지가 뒤로 던진 백호는 공교롭게도 계율 원주인 혜명의 얼굴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혜명 대사의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공각이 두팔을 들어올려 날아오는 백호를 받아 들려 하는 순간이었다. 혜명 대사의 얼굴 쪽으로 날아들던 백호가 혜명의 얼굴 석자 정도 앞 허공에서 갑자기 뚝 멈춰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공각을 흘낏 한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도도한 걸음으로 허공을 걸어 설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허, 허공답보!"
놀란 공각의 입에서 신음 처럼 한마디가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혜명의 입이 열렸다.
"허허허. 무에 그리 놀라는가. 그러기에 천년 마령호라고 하는게지. 아마도 저 천년 마령호를 감당해낼수 있는 고수를 찾기란 현 무림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일게야. 그러니 자네들도 겉모습이 귀여워 보인다고 천년 마령호에게 경거망동 해서는 안될지니 내말 명심하도록 하게."
혜명의 말이 끝나자 십팔나한들이 일제히 합장하며 굉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미타불. 명심하겠습니다. 원주님."

한편 산적 숙부라고 부른 사내의 품에 안긴 설지는 소림승들의 대화가 마무리 될 그때 쯤에 산적 숙부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속삭인다고는 하나 성수의가의 마당에 있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무술을 익힌 절정 고수들임에야 설지의 작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리 없었다.
"산적 숙부! 근데 산적떼는 왜 데리고 오셨어요?"

설지의 이 말이 끝나자 장내에는 일순 기괴한 정적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느라 고생하는 소림승들의 얼굴 표정과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의 우락 부락한 사내들의 표정이 대조를 이루면서 재미있는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크하하! 산적떼라. 그래 네말이 맞다. 암 그렇고 말고 산적떼가 맞아! 크하하!"
설지의 말을 들은 산적 숙부라는 사내는 재미있다는 듯 외치고는 뒤를 돌아보며 산적떼(?)들에게 커다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 놈들아. 그 되지도 않은 험악한 인상 풀고 내 질녀와 인사나 나누거라. 내 품에 안긴 이 절세 가인이 바로 내 질녀이자 성수의가의 소가주인 나설지이니라."
산적 숙부의 말이 끝나자 숙부의 품에서 냉큼 벗어난 설지가 귀여운 머리를 조아리며 인삿말을 먼저 건넸다.
"안녕하세요! 산적떼 아저씨들. 나설지예요."
나설지의 인사가 끝나자 우락 부락한 사내들 중에서 한 사내가 대표로 나서며 설지를 향해 말을 했다.
"그래 반갑구나. 우리 산적떼는 녹림이십사절객이라고 불리는 녹림 총표파자의 호위 무사들이란다."
"녹림 이십사절객이요? 웅, 그냥 산적떼로 부를래요. 말이 너무 어려워."
설지의 이 말을 끝으로 설지의 뒤쪽에 있던 소림승들의 입속에서는 기어코 억눌린 웃음소리가 하나 둘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설지에게는 단순히 산적떼로 전락해버린 녹림 이십사절객이지만 강호에서는 이들 녹림 이십사절객의 위치가 절대 낮지 않았다. 각각 검, 도, 창, 편, 겸 등의 스물 네가지 병기에 정통한 이십사인으로 구성된 녹림 이십사절객은 소림의 십팔나한과 비교해도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의 무위를 지니고 있으며 이십사절객이 펼치는 녹림 절대 수호진은 여태껏 한번도 격파당하지 않은 절대 방어진으로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소림 십팔나한과 녹림 이십사절객은 평소에 서로를 잘 아는 듯 눈인사를 주고 받으며 가벼운 목례로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설지에게 산적 숙부라고 불렸던 사내는 먼저 나서서 소림의 계율 원주인 혜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대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래무양 하셨습니까?"
"허허허! 아미타불. 총표파자께서도 그동안 별래무양 하셨소이까?"
"하하! 산적들이야 본래 먹고 노는게 일인데 뭐 별 탈이야 있었겠습니까?"

설지에게는 산적 숙부로 혜명 대사에게는 총표파자로 불린 이 인물이 바로 당금 녹림 칠십이채의 주인인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으로 그는 녹림 총표파자의 자리에 오른 후 기울어가던 녹림 칠십이채의 모든 힘을 결집시키고 체제를 정비하여 단 오년만에 녹림 칠십이채를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키워낸 녹림이 탄생시킨 절대 영웅이었다.

소림과 녹림의 인물들이 의가라고는 하나 현 천하제일가의 자리에 있는 성수의가의 마당에서 한자리에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을 무렵 막 성수의가의 대문을 넘어오고 있는 하나의 작은 인영이 있었다. 그 작은 인영은 설지의 곁에 있는 작은 백호와 비슷한 또 다른 백호였다. 그리고 백호의 뒤를 따라서 일남일녀가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캬오오."
대문을 들어선 백호는 낮지만 날카로운 소리를 토하며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찾는듯 하더니 이내 설지를 발견하고는 앙증맞은 발을 힘차게 디디며 설지를 향하여 뛰어 왔다.

<계속>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


성수의가

1. 천하제일가

"꺄르르. 에잇, 거기 서!"
머리를 양갈래로 예쁘게 묶은 십여세 정도의 어린 소녀 하나가 손에 작은 목검을 들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채 앞서 달려가고 있는 일수일인을 쫓고 있었다. 소녀의 앞을 달리고 있는 일수일인은 한마리의 작은 고양이로 보이는 일수와 소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지만 머리 한올 없는 특이한 까까머리 모습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어린 동자였다.

소녀와 일수일인이 뛰어 다니며 놀고 있는 이 곳은 어떤 장원의 제법 커다란 마당으로 그 가운데에는 여섯개의 평상이 놓여져 있으며 그 평상 위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햇빛에 노출되며 말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백의를 입은 의원 차림의 청년 세명이 일일이 평상을 돌아 다니며 풀들을 뒤집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약초를 말리고 있는듯 했다.

세 청년들은 약초를 살피는 일을 하면서도 소녀와 뛰어 놀고 있는 일행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가끔씩 쳐다보고 있었는데 소녀와 일수일인의 행동이 조금은 특이하게 보였다. 고양이 처럼 보이지만 설산의 눈처럼 하얀 백색의 털로 뒤덮인 몸에 아름다운 갈색의 줄무늬가 선명한 일수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까까머리와 함께 어딘가 특이한 분위기가 있는 듯한 동자는 마당을 가로지르고 평상들 사이사이를 오가며 쫓고 쫓기고 있지만 장애물들을 절묘하게 피해 다니며 한번도 세명의 의원들에게 부딪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어수선하지만 절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이 곳은 귀주성의 귀양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서강 묘족 마을에서 가장 큰 장원의 마당으로 장원의 커다란 대문 위 현판에는 일필휘지로 성수의가라고 용이 비상하는 듯한 글씨를 새겨넣은 현판이 달려 있었다. 성수의가의 널찍한 마당에서 사방을 휘휘 둘러보면 고산준봉으로 사방이 가로막혀 있어 이 곳이 오지의 마을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하게 하였다.

삼백년 전부터 천하인들에게 천하제일가로 존경과 칭송을 받고 있는 성수의가는 중원 제일 의가의 위치도 함께 차지하고 있었다. 삼백년전 홀연히 등장하여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의술을 펼치며 명성을 쌓아가더니 어느 날 부터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무료로 치료를 해주는 대신 부호와 고관대작들에게는 많은 치료비를 받아 가난한 백성들의 규휼에 앞장 서는 한편으로 강호 무림인들에게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치료를 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부터 성수의가는 천하인들의 존경을 받는 의가로 그리고 의와 협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중원인들의 가슴에 새겨지게 되었다.

천하제일가이자 중원제일의가인 성수의가의 마당 한가운데를 쫓아다니며 놀고 있는 세인영들을 장원 본채의 처마 아래에서 눈으로 쫓고 있던 노승이 곁에 있는 사십대의 장년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미타불! 장총관. 소공녀께서 꽤나 즐거우시나 봅니다. 그려. 껄껄껄"
"하하하. 예. 대사님. 요즘 소공녀님의 장난이 하도 심하셔서 가끔 가주님께 꾸중을 들으시지만 그때 뿐이시지요."
"허허허. 중원의 홍복이지요."
"예. 그런것 같습니다."

뜻모를 말을 주고 받은 총관이라고 불린 장년인과 노승은 다시 마당을 열심히 뛰어 다니며 장난을 치고 있는 세인영들을 눈으로 쫓으며 흐뭇한 미소를 얼굴 가득 피워 올리고 있었다. 약간 배가 나온 뚱뚱한 체구의 장총관은 성수의가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총관으로 장이모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장이모의 집안은 대대로 성수의가의 총관을 지낸 가문으로 현재 6대째 총관이 바로 장이모였다. 그리고 총관의 옆에서 말을 건넨 노승은 현 소림사의 방장인 혜공대사의 사제로 무림에서는 일권으로 하늘도 무너뜨린다 하여 천붕일권이라는 별호로 알려져 있는 혜명 대사였다.

헤명 대사의 뒤로는 스무명 남짓한 승려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는데 그들의 정확한 숫자는 열여덟명으로 소림의 당대 십팔나한이었다. 하남성의 소림사에서 천붕일권 혜명과 십팔나한이 성수의가를 방문했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 분명하겠건만 성수의가 측에서는 오늘 소림사 승려들의 방문이 어제와 같은 매일 똑같이 벌어지는 평범한 일상의 하나인 듯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렇게 각자 제 할일을 하며 의가의 하루를 흘려 보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아미타불. 장총관."
"예 대사님."
"저기 맨 앞에 뛰어 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백호 중 하나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3년전 그때 부터 한시도 소공녀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하고 있지요."
"허허허. 인세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천년 영물이 소공녀를 지켜주고 있으니 안심이 되오이다."
"예. 대사님. 그렇지 않아도 가주님께서도 만년삼왕인 초아와 천년 영물인 백아와 호아의 덕분에 소공녀님에 대한 걱정을 많이 덜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허허허. 그렇겠지요."

마치 옛날 이야기 하듯이 장총관과 혜명 대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뒤에서 듣고 있던 소림의 십팔나한들은 경악한 표정을 감출수가 없는 듯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다음 주에 계속>

읽어두기 : 이 글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현재의 중국과 그 위치가 맞지 않을 수 있으며 단순히 글의 배경으로 사용하기 위해 무협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들을 사용한 것으로 혹시라도 지명과 위치가 같다면 우연이거나 의도적인 배치 임을 미리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