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5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2

 

철무륵이 자신의 삼장 정도 앞에 와서 우뚝 멈춰서자 나운학은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어 정식으로 비무를 청했다.
"성수신의 나운학이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 대협께 한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말을 하면서 깊숙한 포권지례로 비무 요청의 예를 표한 나운학이 자신의 왼손에 들려있던 한자루 청강검의 검파(칼자루)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움켜 쥐고 검초(칼집)에서 검을 빼 자신의 가슴어림께에서 약간 비스듬히 앞으로 기울여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런 나운학의 모습을 일별한 철무륵도 한마디 말로 비무에 응할 것임을 표한 후 자신도 지니고 있던 검의 검초에서 검을 빼 가볍게 자신의 허리 아래로 늘어 뜨렸다.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 성수신의 나운학의 비무 요청을 승락하는 바요."

그러나 검을 빼서 허리 아래로 늘어 뜨리고 있는 철무륵의 심정은 결코 편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쩔수 없이 비무에 응하기는 했으나 결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나운학이었기에 괜히 아끼는 의동생의 마음이 이번 비무로 다치게 될까 저어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운학은 그런 철무륵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빼들고 있던 검의 검신을 곧추세우는 동시에 기세를 발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여태까지 온화한 서생 같던 나운학의 기도가 갑자기 일변하는 것 같더니 관전하고 있던 장내의 모든 인물들에게 까지 그 막대한 기세의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지기 시작했다.

일변한 나운학의 기세를 처음으로 접한 철무륵은 잠시 멈칫거리는 듯 하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얼굴에 띄며 잠시 고개를 주억거린 후 허리 아래로 자연스레 내려뜨려 놓았던 자신의 검을 곧추세우며 자신도 모든 기세를 모아 자신의 검에 의지를 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장내에는 나운학이 지닌 기세와는 또 다른 거친 느낌의 기세가 장내를 장악하며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으하하! 운학 아우! 나를 이제까지 속이고 있었구만. 그런 기세라니, 내 오늘 큰 망신을 당한다 해도 그리 부끄럽지 않을것 같구먼. 그래."
"하하! 형님도 참, 속이다니요. 그저 오늘 까지는 그다지 무력을 사용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좋네, 좋아. 내 선공은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네."

철무륵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운학이 자신이 들고 있던 검에 내공을 주입하자 갑자기 검신 길이의 두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뿌연 검신 모양의 빛무리가 검봉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내의 인물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부르짖었다.
"거, 검강. 검강이다!"

성수신의가 검강을 발현할 정도의 내공과 무력을 지니고 있음을 장내의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었기에 나운학의 검봉에서 빠져나와 일렁이는 새하얀 빛의 검강을 바라보는 장내의 인물들은 경악성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나운학의 검강을 지켜보던 형산파 장문인 길태세도 경악을 발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고 다급히 주위 모두에게 소리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십장 이상은 떨어지도록 해라. 서둘러."

길장문인의 다급성을 접한 장내의 인물들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여 삽시간에 나운학과 철무륵의 주위 삼십장 이내에서 물러나 멀어져 갔다. 한편 주위의 인물들이 모두 물러서기 시작할 즈음 철무륵은 당황한 표정이 되어 나운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강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저 자신에 버금가는 기세를 발하기에 자신 보다 한수 정도 아래이거나 잘해야 동수일 것이라는 어림 짐작을 하고 있던 철무륵은 나운학의 검봉에서 일렁이는 검강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의 판단이 터무니 없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도 검강을 발현할 수 있으며 현 강호에도 몇명의 무인들이 검강을 발현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결단코 눈앞에 보이는 나운학의 검봉에서 빠져나와 찬란하게 빛나는 검강 만큼의 강기는 그 누구도 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저런 자연스러운 자세라니, 너무도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철무륵이 경악할 일은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무려 두자 이상의 너무도 선명한 검강을 발현하고 있는 나운학이 입을 떼어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검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내공이 소모됨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을 집중해야 함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었다. 그런데 나운학은 그런 무인들의 기본 상식을 보란듯이 무시하며 검강을 발현한 채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삼재검법이긴 하나 제법 매서울겁니다."
"뭐, 뭐라고, 사, 삼재검법이라고..."

기가막힐 일이었다. 무려 두자 이상의 검강을 발현하고써 고작 삼재 검법을 시전하겠다니... 허나, 이런 철무륵의 기막힘은 잠시 후에 이어진 나운학의 검세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나운학은 곧추세웠던 검신을 가로로 눕히더니 삼재검법의 일초식인 가로베기 횡소천군을 시전해 오고 있었는데 그런 나운학의 검을 바라보고 있는 철무륵의 시야에는 자신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나운학의 검봉에서 쏟아져 나온 검강이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을 향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짓쳐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심정은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도 매한가지였다. 하늘 가득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의 새하얀 검강이 나운학의 검봉에서 빠져 나와 마주 선 철무륵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은 기이한 장면을 목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해 무수히 날아오는 검강을 바라보던 철무륵은 어떻게 막아야할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그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한번 힐끗 바라보고는 이내 체념한 듯 새하얀 빛무리가 자신을 덥쳐오는 장면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철무륵을 양단해 버릴 듯 무서운 기세로 철무륵을 향해 날아가던 검강들은 기묘하게도 철무륵을 그대로 지나쳐 철무륵이 서있는 뒷 쪽 공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수히 떨어져 내리는 검강과 부딪힌 땅 바닥은 엄청난 폭음을 토해내며 삽시간에 초토화가 되어 갔다. 검강과 요란한 폭음이 모두 사라지고 장내에 찾아 온 것은 정적과 뿌연 흙먼지였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흙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장내의 광경은 말 그대로 참혹지경이었다. 철무륵이 서 있는 뒷편의 모든 땅거죽이 뒤집힌 것은 물론 군데 군데 엄청난 크기의 웅덩이가 검강의 여파로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내에는 당혹한 목소리 하나가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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