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17일 토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5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엽정의 이야기를 대략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았다.
마을의 유일한 광장과 접해있는 성수의가를 시작으로 작은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며 약 일천여호가 자리 잡고 있는 이 곳 묘족 마을은 사방이 높은 험산준봉으로 가로막혀 있고 마을을 드나드는 유일한 길은 마을 앞을 흐르는 서강으로 가로막혀 있어 외적의 침입이 어려운 천혜의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는 지형이었다.

이로인해 예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비경과 더불어 산비탈을 타고 안락하게 주저 앉은 묘족 마을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풍광으로 인근에 유명하다가 성수의가가 자리잡고 부터는 강호의 성역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묘족 마을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마을 앞 서강에 놓여 있는 유일한 다리인 성수교를 건너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위중한 상처를 입은 무림인들이 성수의가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마을로 들어오면서 공연한 시비를 만들지 않기 위해 마을 입구의 성수교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를 풀어 놓고 마을로 들어 오기 시작하면서 성수교는 해검교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무당의 해검지와 더불어 해검교는 강호의 이대 해검 지역이 된 것인데 당금에 이르러서는 무림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묘족 마을로 들어 오기 이전에 반드시 해검교에서 몸에 지니고 있는 병장기를 풀어 놓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풀어 놓은 병장기를 관리 하고 있는 것은 성수의가와 인접해 있으며 의가주인 나운학과 의형제로 맺어진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이 거주하고 있는 녹림 총본산에서 산적들이 내려와 무기를 관리함으로써 병장기 분실로 인한 불미스러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여 주고 있었다.

산적들에게 무기를 맡긴다는 것이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임은 당연한 것으로 당금 천하에서 성수의가와 녹림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성수의가의 가주는 대대로 성수신의라는 별호로 세인들에게 불리어지고 있었는데 성수의가의 당대 성수신의인 나운학에게는 형이 한사람 있었다. 삼년전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만해도 그의 형 나운해가 당대의 성수의가 가주이자 당대의 성수신의였었다.

삼년전 오월의 이맘때 성수신의 나운학은 아름다운 아내와 이제 막 여섯살이 된 어린 딸 설지와 함께 연잎으로 싼 밥과 반찬들을 챙겨 넣은 대나무로 엮은 가방을 들고 해검교를 건너 태극천으로 소풍을 나서고 있었다. 묘족 마을에서 해검교를 건너 관도를 따라 조금 걷다가 오른쪽으로  빠지는 오솔길로 접어 들어 한식경 정도 걸으면 너른 평지가 나오는데 그 평지 중앙에 태극 모양으로 땅이 내려 맞은 특이한 지형이 있었다.

거기에 어떻게 해서 그런 지형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태극 모양으로 내려 앉은 땅위로는 연중 한결 같은 양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태극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었다. 성수의가에서는 이 곳 태극천의 물을 길어다 환자 치료를 위한 성수의가 비전의 환단을 제조하고 있었는데 성수보령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환단의 약효가 소림의 소환단과 비교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하여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영단으로 소문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내와 딸을 데리고 태극천으로 소풍을 나온 나운학은 몇그루 나무가 서 있는 태극천이 바라다 보이는 한쪽 평지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벌써 부터 태극천 주위를 뛰어 다니는 딸 설지를 포근한 미소로 지켜 보다가 이내 아내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소풍의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한편 태극천 주위를 뛰어 다니며 신나게 놀던 설지는 다섯살 때 처음으로 태극천에서 마주친 두마리 아기 호랑이를 오늘도 변함없이 만나게 되었다.

온몸이 하얀 두마리 아기 호랑이는 오늘도 설지를 만나 반갑다는 듯 크르릉거리는 낮은 울음 소리를 토해내며 설지 주위를 뛰어 다녔다. 설지는 두마리 아기 호랑이를 만난 후 둘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두마리 중  덩치가 작은 놈에게는 백아라는 이름을 좀더 덩치가 큰 놈에게는 호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운해가 설지에게 왜 이름을 백아와 호아라고 지었냐고 물어보자 '둘다 백호잖아, 그러니 백아와 호아지'라는 대답이 나온 것은 다섯살 짜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설지는 물론이고 나운해 조차도 두마리 백호가 천년마령호인줄은 꿈에도 몰랐고 단순히 어미를 잃은 아기 백호들로 알고 있었다. 처음 아기 백호들과 같이 있는 딸을 발견한 나운해는 질겁을 하고 혹시 주변에 어미가 없는지 세심히 관찰하였으나 어디에서도 어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운해는 두마리 아기 백호들이 어미 몰래 태극천으로 내려 왔거나 어미을 잃어버린 아기 호랑이로만 알고 있었다.

나운해는 아기 백호들과 설지가 함께 노는 장면을 가끔 목격하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내버려 두었는데 설지와 아기 호랑이들의 인연은 그렇게 오늘 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만에 다시 만난 설지와 백호들은 신나게 어울려 뛰어 놀고 있었는데 어느순간 두마리 백호가 갑자기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쪽으로 시선을 주는 것이었다.

그때 설지의 눈에도 붉은색 장포를 걸친 사내 하나가 비틀거리며 장내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전신을 둘러싼 붉은 장포는 예리한 병장기에 군데 군데 찢어져 있었고 찢어진 틈 사이로는 언뜻 언뜻 피를 흘리는 상처 자국들이 보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장내로 들어서던 사내는 설지의 부모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운해 앞으로 걸어온 사내는 갑자기 풀썩 쓰러지며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내의 모습을 본 나운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부축하며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오."
그러나 이미 사내는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는지 나운해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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