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15

 

다음 날 아침!
의가의  앞쪽으로 보이는 천량산의 봉우리 사이로 붉은 기운을 띤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이른 시각에 이미 성수의가는 몹시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의가의 앞 광장에서 부터 해검교로 이르는 길에는 이십여대에 이르는 긴 마차의 행렬이 늘어서 있었고 의가의 하인들과 시비들은 부지런히 각 마차에 필요한 물품들을 의가의 창고에서 마차로 옮겨 싣고 있었다.

부산스러운 바깥의 동정에 전각에 딸린 방 하나의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작고 하얀 머리 하나가 쏙 튀어 나왔다. 뒤 이어 또 다른 하얀 머리 하나가 방금 전 나온 하얀 머리 위로 겹쳐지더니 이내 검고 부스스한 큰 머리 하나가 하얀 머리들 위로 불쑥 튀어 나왔다. 바로 백아와 호아, 그리고 설지가 바깥의 부산스러움에 잠을 깨어 무슨 일인가 싶어 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것이다. 그리고는 잠시 후 설지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앗! 늦었다. 늦었어!"

한 소리를 외친 설지가 방문을 쾅하고 닫더니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때쯤 교혜린은 손에 커다란 상자 하나를 챙겨들고 설지를 깨우기 위해 설지의 방 바로 앞에 당도해 방문을 열며 설지를 조용한 목소리로 불렀다.
"설지야! 일어났니? 일어났으면 어서 준비하거라."
"응! 응! 다 됐어. 다 됐어."

말을 마친 설지의 앞을 바라 본 교혜린은 설지의 앞에 놓인 물건들을 살펴 보더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서책과 말린 과일들이구나? 서책은 그렇다해도 말린 과일은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될텐데 쓸데없는 일을 했구나."
"아냐, 아냐, 이것들은 백아와 호아랑 나만 먹을거란 말이야."
"호호호, 그래 알겠다. 어서 나와서 씻고 출발 준비하렴."
"응! 응! 아참, 그런데 이것들은 어디다 실어야 해?"

설지는 말을 하면서 꺼내 놓은 서책들과 말린 과일이 담긴 주머니를 가리켰다.
"가주님이 타고 가시는 마차에 실으렴. 그럼 되지 않겠니?"
"아! 맞다. 그럼 되겠네. 나 씻으러 갔다 올께."

백아와 호아를 대동하고 부리나케 방문을 열고 우물가로 달려가는 설지를 바라보던 교혜린은 이내 옷장을 열고 설지에게 필요한 옷가지들과 그동안 의가내에서 설지가 자주 사용하던 물건들을 한데 모아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용히 설지의 물품들을 챙기던 교혜린의 동작이 멈출때 쯤 방 바깥에서는 요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지가 돌아오는 소리였는데 설지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달려갈 때 와는 달리 제법 정갈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설지를 뒤따라 온 것은 백아와 호와 외에도 당나귀 한마리가 더 있었다. 바로 밍밍이라는 이름을 가진 설지의 애마였다.

"응? 언니, 그 상자는 뭐야?"
"호호, 요녀석아. 네 옷가지랑 네가 쓰던 지필묵, 그리고 네가 자주 쓰던 물건들이란다."
"아! 맞다. 그런 것들도 챙겨야 하는구나. 헤헤헤"
"호호. 녀석도.. 다 씻었으면 얼른 저기 서책들과 말린 과일들을 마차로 가져 가거라. 가주님이 타실 마차는 의가 바로 앞에 있으니까 멀리 가지 않아도 될거야."
"응! 응! 알았어. 우차!"

설지가 가벼운 동작으로 방문 앞에 쌓여져 있는 서책들을 들어 올리자 제법 많이 쌓여 있던 서책들은 설지의 눈을 가릴 정도 까지 올라와 버렸다.
"앗, 너무 높아 안되겠다. 백아랑 호아도 한권씩 들어."
설지가 말을 하면서 서책 한권씩을 백아와 호아의 입에 물려 주고는 나머지 서책을 들고 비틀거리는 동작으로 의가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입에 서책 한권씩을 물고 있는 백아와 호아가 뒤 따랐고 맨 마지막에는 당나귀 밍밍이 그들을 따라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켜요, 비켜요."
뒤뚱거리며 의가의 정문 앞에 세워진 마차로 다가가던 설지의 눈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들어 왔다. 이미 대부분의 마차에 짐이 다 실렸고 출발 준비를 마친 마차를 둘러보며 서 있던 성수의가 전대 가주 나운영과 그의 부인이자 황제인 성화제의 누이 동생인 명화 공주는 서책을 잔뜩 들고 마차로 다가오는 설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띠며 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명화 공주의 손에는 옷처럼 보이는 것이 들려 있었다. 위태 위태한 발걸음으로 서책을 마차에 올려 놓은 설지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그래. 설지도 잘잤느냐?'
나운영의 물음에 설지는 귀여운 고갯짓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손에 들린 옷이 자신을 위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지의 의문 가득한 시선에 대답이라도 하듯 명화 공주는 손에 들고 있던 장포를 펼쳐서 설지에게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호호호. 요녀석, 눈치는 빨라 가지고, 이 할미가 설지의 중원 출도를 기념하기 위해서 장포 한벌을 지어 봤단다. 어떠냐? 예쁘지?"

말을 하면서 명화 공주는 펼쳐 들고 있던 장포를 설지에게 입혀 주었다. 하얀 색으로 된 장포는 설지의 무릎 아래 까지 내려오는 길이로 설지의 몸에 꼭 맞는 크기였다. 장포의 왼쪽 가슴 어림에는 둥근 흑색 바탕에 황금 색의 수실로 성수의가를 상징하는 표식인 두마리의 용이 태극천을 감싸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얀 경장 차림이었던 설지에게 입혀진 하얀 장포는 특이한 재료로 만들어진 듯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 이게 뭐야? 옷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자신에게 입혀진 장포가 신기한 듯  이리 저리 살펴보던 설지가 명화 공주를 향해 이렇게 말하자 잔잔한 미소로 설지를 보고 있던 명화 공주가 설지의 궁금함을 풀어주려는 듯 말을 받았다.
"호호, 그 장포는 내가 오라버니에게 말해서 구한 천삼자로 짠 것이란다. 어지간한 도검으로는 그 장포를 침범하지 못할게야."
"정말? 백아, 발톱."

도검불침이라는 말에 백아의 발톱을 이용해 시험해 보려던 설지에게 백아는 고개를 저으며 설지의 머리 속으로 의념을 전달했다. 묵묵히 백아의 말을 전해 듣고 있던 설지는 백아의 말이 끝나자 할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이거 백아 발톱에 못 견딘다고 하는데?"
명화 공주는 설지의 말에 잠시 당혹해 하는 것 같더니 이렇게 말했다.
"호호, 요녀석아. 중원에 백아와 호아가 또 있겠니?"
"없어? 없어? 응 그렇구나."

할머니와 백아를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 설지는 환하게 웃으며 할머니에게 안겨 들었다. 설지를 안은 명화 공주는 의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운영을 향해 말했다.
"상공, 식당으로 가시지요."
"그럽시다."
"응? 밥 먹고 가야해?"
"그럼, 요녀석아. 밥도 굶고 먼길을 갈려고 했더냐. 이 할미와 함께 아침은 먹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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