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5일 일요일

[무협 연재] 성수의가 9


한편, 경황이 없는 와중에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나운영에게 수혈을 집혀 잠이 든 설지가 잠들기 전에 나운영에게 들려 주었던 자초지종에서 작은 호랑이가 혈사교의 무리들을 도륙했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운학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설지가 그때 까지도 손을 풀지 않고 작은 호랑이 한마리를 두손으로 꼭 안고 있는 것을 내려다 보았다.

때 마침 설지에게 안겨 있던 작은 호랑이도 초롱 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나운학의 시선을 따라 눈을 맞추며 깊숙한 시선으로 나운학과 눈을 맞추었다. 그렇게 시선을 맞춘 둘은 한순간 이채를 발하는가 싶더니 제법 긴 시간 동안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사실 지금 나운학은 작은 호랑이 백아와 눈을 맞추는 순간 자신의 머리 속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백아의 심령에 무척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성수의가에서 나고 자랐으나 영물과 심령상의 대화를 나눈다는 기사는 난생 처음 겪는지라 나운학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 동안 시선을 맞춘채 심령으로 전해지는 백아의 말을 모두 들은 나운학은 아들 부부의 시신을 바라 보며 침통해 하고 있는 나운영에게 천천히 다가가 백아와 나눈 심령상의 대화를 간추려 들려 주었다.

"음, 그러니까 설지의 품에 있는 백아와 저 호아가 그냥 아기 백호가 아니라 영물인게로구나?"
"예, 아버님. 아마도 천년마령호라고 사람들이 이름을 붙였던 바로 그 전설상의 존재 같습니다."
"설지의 부모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한다고?"
"예. 자기들도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쩔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대신 지금 부터는 설지를 자신들이 지켜봐 주겠다고 하는군요."
"허허. 어처구니 없이 부모를 잃은 설지가 복연을 만난 셈이군."

말을 하던 나운영은 두마리 백호에게 깊숙이 머리 숙여 예를 표하며 이렇게 이어 말했다.
"백공, 호공! 설지를 구해주셔서 고맙소. 그리고 설지를 잘 부탁하겠소. 아마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백공과 호공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 될테지만 이해해 주리라 믿소"
나운영이 이렇게 말하자 백아와 호아는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였다. 백아와 호아의 모습을 잠깐 바라 본 나운영은 문득 생각난 듯 아들인 운학에게 물어 보았다.
"운학아! 그런데 나에게는 백아와 호아의 심령이 전달되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글쎄요. 저도 거기 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운학의 말을 듣고 나서 무엇인가를 한참 생각하던 나운영은 결론을 내린 듯 이렇게 말했다.
"음. 전부터 백아와 호아가 설지와 쉽게 어울렸던 것을 보면 아마도 너와 설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성이 뛰어난 때문인 것 같구나. 오늘부터 백아와 호아는 우리 성수의가의 식솔이니 세심히 신경쓰거라."
"예. 아버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혈사교라는 그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에게 성수의가의 이름으로 배첩을 보내도록 하거라. 이번 일의 관련자들을 한놈도 빠트리지 말고 성수의가로 압송해 오라고 말이다. 만일 거절한다면 혈사교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거라."
단호하게 내뱉는 나운영의 음성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묻어 나와 주변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황상께도 이 일을 알려드려야 하니 귀주성의 성주에게 자세한 내막을 적은 배첩을 보내 황실로 보내도록 당부하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님."
"네 형 부부의 시신을 수습하고 의가로 돌아가도록 하자."
"예 아버님."

나운영과 나운학이 말을 마칠 즈음 두사람의 눈에는 새롭게 장내에 막 도착한 일단의 무리들이 서둘러 나운영 부자 앞으로 달려 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장대한 체격에 험상궂은 인상의 그 인물들은 한 눈에 척 보기에도 '나 산적!" 이라고 이마에 써 붙여 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를 풍기는 무리들이었다. 일행의 제일 앞에서 달려 오고 있는 인물은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여타의 산적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외부로 표출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현 녹림 총표파자 철무륵이었다. 철무륵은 나운영 부자의 앞에서 이르자 포권지례를 하며 나운영에게 예를 갖춘후 황급히 나운영을 향해 입을 떼었다.
"아버님. 이게 어떻게 된 일 입니까? 운해 형님이 돌아가시다니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녹림의 총본산이 있는 천량산과 지척 지간에 있던 성수의가에서는 평소에 자주 녹림인들과 교류를 하며 지냈는데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약재를 채집하기 위해서 의가의 식솔들은 천량산을 자주 오르내려야 했고 그 과정에서 녹림인들과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성수신의 나운해도 약재 채집에 나선 의가 식솔들을 이끌고 자주 천량산을 오가다 자연스레 철무륵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보다 어리지만 호탕한 성품의 철무륵과 부드러운 성품의 나운해는 서로의 인품에 끌려 형님, 아우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부터 철무륵은 자주 성수의가에 들르기 시작했으며 격의없이 의가 식솔들에게 다가가 호탕한 성격으로 친분을 나누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부터인가는 나운영의 둘째 아들 처럼 의가 식솔들에게 대접받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철무륵이었기에 나운해의 피살 소식을 듣자마자 부하들을 이끌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 철무륵의 인사를 받은 나운영은 손에 들고 있던 혈패를 철무륵에게 건네주며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무륵이 왔는가. 이게 무언지 알겠지? 혈사교 놈들이 운해를 살해하고 도주했네."

나운영은 아들인 나운해의 죽음을 입에 올릴때 마다 강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운영으로 부터 건네 받은 혈패의 앞뒤를 살펴 본 철무륵도 몸에서 자욱한 살기를 뿜어내며 스산한 음성으로 함께 온 일행들에게 명령했다.
"주위를 살피고 경계하도록!"
"예. 총표파자!"
철무륵의 말이 끝나자 이십팔명의 산적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철무륵은 그런 부하들을 일별한 후 나운영을 향해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혈사교를 어떻게 하실겁니까? 지금이라도 제가 부하들을 이끌고 놈들을 추격해서 모두 잡아들일까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네. 운학이가 알아서 할거야. 자네는 운학이나 도와주도록 하게."
"그리고 운학이는 장내를 서둘러 정리하고 의가로 오도록해라. 아무래도 안사람이 걱정되어서 난 먼저 의가로 가봐야 겠다."
말을 마친 나운영은 서둘러 장내를 벗어나 의가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깨가 오늘따라 매우 무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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