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소프트 록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소프트 록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Terry Jacks - Seasons In The Sun

 

Terry Jacks - Seasons In The Sun

캐나다의 가수 겸 작곡가 '테리 잭스'는 매니토바(Manitoba)주 위니펙(Winnipeg)에서 태어나 브리티시컬럼비아(British Columbia)주 밴쿠버(Vancouver)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릴때 부터 음악에 많은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테리 잭스가 십대가 되었을 무렵에는 스스로 곡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부터 가수가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열여덟살이 되었을 때 밴쿠버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밴드인 '체스맨(The Chessmen)'에 보컬 겸 기타 주자로 가입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밴쿠버 지역의 클럽들을 무대로 활동했던 체스맨은 캐나다의 CBC 텔레비전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음악 프로그램인 'Music Hop'에도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1964년 부터 1966년 사이에 네곡의 캐나다 싱글 차트 탑텐 진출 곡을 만들기도 하였다. 체스맨이 'Music Hop'에 출연할 당시인 1965년에 테리 잭스는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당시 열일곱살이던 여자 가수 '수잔 페스클레비츠(Susan Pesklevits)'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우리나라 팝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인 'Evergreen'의 주인공으로 1967년에 테리 잭스와 결혼하여 '수잔 잭스(Susan Jacks)' 라는 이름으로 팝팬들에게 알려진 가수이다.

1966년에 체스맨에서 탈퇴한 테리 잭스는 'Music Hop' 출연을 계기로 친밀한 사이로 지내다 연인으로 발전한 수잔 페스클레비츠와 함께 듀오를 결성하여 클럽 무대를 통해 데뷔하였다. 이들 듀오는 테리 잭스가 기타 반주를 담당했고 수잔 페스클레비츠가 보컬을 담당했었다. 고된 클럽 생활을 통해 사랑이 깊어진 두 사람은 1967년에 결혼하여 부부 듀오가 되었지만 듀오로 계속 활동하기에는 사운드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이에 두 사람은 멤버를 보강하기로 하고 '크레이그 맥코우(Craig McCaw, 기타)'와 '사트원트 싱(Satwant Singh, 드럼)'를 합류시켜 '파워라인(Powerline)'이라는 이름의 4인조 밴드로 재편하고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파워라인은 '윈킨 블린킨 앤 놉(Winkin' Blinkin' & Nob)'이라는 이름을 거쳐 최종적으로 '파피 패밀리(The Poppy Family)'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1969년에 데뷔 음반 'Which Way You Goin' Billy?'를 발표하였고 1971년에 음반 'Poppy Seeds'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두장을 음반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파피 패밀리는 밴드의 주축인 수잔과 테리 부부가 1973년에 이혼한 후 서로 솔로 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면서 자연스레 해산의 길을 걷게 된다. 수잔 잭스와 이혼 하기 바로 직전인 1973년에 테리 잭스는 아내인 수잔 잭스의 데뷔 음반 'I Thought Of You Again'에 제작자로 참여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솔로 데뷔 음반 'Seasons In The Sun'을 제작하여 '벨 음반사(Bell Records)'를 통해 1973년 12월에 음반의 타이틀 곡인 'Seasons In The Sun'을 싱글로 먼저 발표하였다.

벨기에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던 가수 겸 작곡자인 '자크 브렐(Jacques Brel)'이 1961년에 'Le Moribond'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었던 곡을 영어로 번안한 곡인 'Seasons In The Sun'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 진입후 1974년 3월 2일에 차트 1위에 올랐으며 이후 3주간 1위 자리를 지키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죽음을 앞둔 이가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짐을 아쉬워 하는 내용의 가슴 아픈 이별 이야기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Seasons In The Sun'은 테리 잭스 이전에 미국의 포크 트리오인 '킹스톤 트리오(The Kingston Trio)'와 영국의 비트 밴드인 '포춘스(The Fortunes)'가 먼저 싱글로 발표하였으나 테리 잭스의 곡 만큼 주목받지는 못하였다. 한편 'Seasons In The Sun'은 1999년에 아일랜드의 팝 밴드인 '웨스트라이프(Westlife)'가 새롭게 편곡한 후 발표하여 다시 한번 주목 받기도 하였다.

테리 잭스 (Terry Jacks) : 1944년 3월 29일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 출생
 
갈래 : 소프트 록(Soft Rock), 팝 록(Pop/Rock)
공식 웹 사이트 : 없음
Seasons In The Sun 감상하기 : http://youtu.be/iA6BqS9FlQ0

2010년 11월 19일 금요일

Fleetwood Mac - Dreams

 

Fleetwood Mac - Dreams

1977년에 발표한 음반 'Rumours'로 1천 9백만장이 넘는 사상 초유의 기록적인 음반 판매를 기록했던 영국 밴드 '플리트우드 맥'은 블루스 록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영국 블루스 록 밴드인 '존 메이올 앤 더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 & the Bluesbreakers)'에서 시작되었다. 1966년에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을 대신하여 존 메이올 앤 더 블루스브레이커스에 기타 주자로 가입했었던 '피터 그린(Peter Green)'은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이듬해인 1967년에 밴드에서 탈퇴하게 된다.

피터 그린이 탈퇴할 당시 존 메이올 앤 더 블루스브레이커스에는 존 맥비와 믹 플리트우드가 피터 그린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피터 그린은 1967년의 어느 날 밴드 탈퇴를 결심하고 두 사람에게 새로운 블루스 록 밴드의 결성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런던에서 1967년에 결성된 새로운 블루스 록 밴드는 피터 그린의 제안에 따라 믹 플리트우드와 존 맥비의 이름을 따서 플리트우드 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결성 이후 밴드의 활동 상황을 살펴 보면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의 플리트우드 맥 멤버들은 밴드의 완성을 위해 나머지 멤버를 찾게 되는데 먼저 합류한 인물이 미국의 블루스 기타 주자인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의 광팬이었던 '제레미 스펜서(Jeremy Spencer)'였으며 마지막으로 베이스 주자인 '밥 브러닝(Bob Brunning)'이 임시 멤버로 합류하게 된다. 밴드의 체제를 완성한 플리트우드 맥은 1967년 8월 13일에 '윈저 재즈 앤 블루스 페스티벌(The Windsor Jazz and Blues Festival)'에 참가하여 데뷔 무대를 가지게 된다.

음악 축제에서 인상적인 무대를 연출한 플리트우드 맥은 영국의 신생 블루스 음악 레이블인 '블루 호라이즌(Blue Horizon)'과 어렵지 않게 음반 계약을 맺을수 있게 되었다. 1967년 11월, 런던의 녹음실로 들어간 다섯명의 플리트우드 맥은 1968년 2월 14일에 음반 'Fleetwood Mac'을 발표하면서 음반 데뷔를 하였다. 피터 그린이 주도하는 블루스 음악으로 채워진 플리트우드 맥의 데뷔 음반은 영국의 앨범 차트에 37주 동안 머무르며 최종 4위 까지 진출하는 히트를 기록하면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데뷔 음반의 성공 이후 플리트우드 맥은 싱글 'Black Magic Woman'과 'Need Your Love So Bad'를 발표하여 히트 시킨 후 두번째 음반 'Mr. Wonderful'을 1968년 8월에 발표하였다. 이 음반 부터 '크리스틴 퍼펙트(Christine Perfect: 1968년에 존 맥비와 결혼 후 크리스틴 맥비로 알려짐)'가 보조 연주자로 참여하여 건반 악기를 담당하게 된다. 두번째 음반 발표 후 플리트우드 맥은 리듬 파트 보강을 위해 당시 열여덟살이었던 기타 주자 '대니 커완(Danny Kirwan)'을 발탁하여 플리트우드 맥의 일원으로 합류시켰다.

플리트우드 맥은 대니 커완과 함께 1969년 1월에 싱글 'Albatross'를 발표하여 영국 싱글 차트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하는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싱글 'Albatross'를 히트 시킨 플리트우드 맥은 1969년 9월에 세번째 음반 'Then Play On'을 발표하였으나 이 음반을 끝으로 피터 그린이 플리트우드 맥에서 완전히 탈퇴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피터 그린이 떠난 플리트우드 맥은 이때 부터 블루스 지향의 음악에서 소프트 록 쪽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첫번째 변화가 제레미 스펜서와 대니 커완의 기타를 주축으로 하여 1970년 9월에 발표한 네번째 음반 'Kiln House'였다.

하지만 이 음반 발표 후 제레미 스펜서 마저도 솔로 활동을 위해 플리트우드 맥에서 탈퇴해 버리자 플리트우드 맥은 보조 연주자로 활동하던 크리스틴 맥비와 '밥 웰치(Bob Welch)'를 새로운 멤버로 받아 들이면서 팝 취향이 강한 음악들을 선보이게 된다. 밥 웰치는 1971년 음반 'Future Games' 부터 1974년 음반 'Heroes Are Hard to Find'까지 활동한 후 솔로 활동을 위해 플리트우드 맥을 탈퇴하였다. 이에 플리트우드 맥은 '스티브 닉스(Stevie Nicks)'와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을 새로운 멤버로 맞아 들이면서 밴드 역사상 최강의 진용으로 밴드를 정비하였다.

플리트우드 맥은 새로운 멤버들과 새 출발을 의미하는 열번째 음반 'Fleetwood Mac'을 1975년 7월에 발표하였다. 이 음반에서 싱글로 발표된 'Over My Head', 'Rhiannon', 'Say You Love Me'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20위 권에 진출하면서 히트를 하였고 음반도 영국 앨범 차트에서는 23위에 그쳤지만 미국의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여 이때 까지 밴드가 발표한 음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음반이 되었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밴드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플리트우드 맥이었지만 밴드 내부적으로는 이 시기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바로 존 맥비와 크리스틴 맥비 부부가 파경을 앞두고 있었고 연인 사이였던 스티브 닉스와 린지 버킹햄이 결별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76년에 서로의 관계를 청산하며 팽팽한 긴장감이 플리트우드 맥에 조성되었으나 플리트우드 맥은 새 음반 'Rumours'의 녹음을 위해 마이애미와 할리우드의 녹음실로 들어가게 된다.

서로의 관계를 청산하며 조성된 멤버들간의 긴장감이 오히려 음반 녹음에는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플리트우드 맥이 1977년 2월에 발표한 새음반 'Rumours'는 'Dreams', 'Don't Stop', 'You Make Loving Fun', 'Go Your Own Way'까지 네곡의 싱글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영국과 미국의 앨범 차트에서 동시에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 했던 히트 곡 'Dreams(영국 24위)'와 3위를 차지했던 곡 'Don't Stop(영국 32위)', 그리고 9위 까지 진출했던 곡 'You Make Loving Fun(영국 45위)'과 10위를 기록했던 'Go Your Own Way(영국 38위)'를 앞세운 음반 'Rumours'는 음반 판매에 있어서도 1천 9백만장을 훌쩍 넘기며 록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기록을 수립하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플리트우드 맥 최고의 음반 'Rumours'는 우리나라에서도 앞서 언급 했던 히트 곡들 외에 'Songbird', 'The Chain'등 음반 대부분의 곡들이 사랑을 받으며 애청곡이 되었으며 음반은 플리트우드 맥 최고의 명반으로 사랑받고 있다.

플리트우드 맥 (Fleetwood Mac) :
스티브 닉스 (Stevie Nicks, 보컬) : 1948년 5월 26일 미국 애리조나 출생
린지 버킹햄 (Lindsey Buckingham, 기타) : 1949년 10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 출생
크리스틴 맥비 (Christine McVie, 키보드) : 1943년 7월 12일 영국 컴브리아(Cumbria) 출생
존 맥비 (John McVie, 베이스) : 1945년 11월 26일 영국 런던 출생
믹 플리트우드 (Mick Fleetwood, 드럼) : 1947년 6월 24일 영국 콘월(Cornwall) 출생

갈래 : 블루스 록(Blues-Rock), 소프트 록(Soft Rock), 팝 록(Pop/Rock)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fleetwoodmac.com/
Dreams 감상하기 : http://youtu.be/bDthfYFsWH0
Don't Stop 감상하기 : http://youtu.be/a8arvEzHsA8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Chris De Burgh -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

 

Chris De Burgh -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

아르헨티나 산타페(Santa Fe)주 베나도뚜에르또(Venado Tuerto)에서 영국군 대령으로 복무하고 있던 아버지와 영국 왕 '헨리 3세(1216-1272 재위)'의 대법관인 '휴버트 디 버그(Hubert de Burgh)'의 후손으로 영국 외교관의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아일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 가수 '크리스 디 버그(본명: Christopher John Davison)'는 우리나라 팝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명곡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4월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라는 아름다운 제목의 이 노래는 해마다 4월이면 꾸준히 라디오의 팝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팝팬들의 애청곡으로 오랜 기간 사랑받고 있는 곡이기도 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크리스 디 버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남동부 렌스터(Leinster)주 웩스퍼드(Wexford)에 있는 12세기에 지어진 휴버트 디 버그의 '바르지 성(Bargy Castle)'을 구입하여 호텔로 개조하고 정착하게 된다. 어릴때 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크리스 디 버그는 호텔의 공연장 무대에서 음악인들이 연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 보고는 했는데 이런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자리잡게 된다. 결국 크리스 디 버그는 틈날때 마다 공연장의 무대에 기타를 들고 올라가 노래를 부르며 경력을 쌓아 나가게 된다.

'트리니티 대학교(Trinity College)'의 영문과에 진학한 크리스 디 버그는 학업과 병행하여 틈나는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커피 하우스와 선술집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대학교를 졸업한 크리스 디 버그는 가족 소유의 호텔로 돌아와 호텔내 공연장의 무대에 기타를 들고 올랐으며 이때 부터 어머니의 처녀 때 성인 '디 버그(De Burgh)'를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매일 밤 호텔내 공연장에 모습을 보이던 크리스 디 버그는 1972년 10월의 어느 날 저녁에 단골 손님을 위한 파티에서 몇 곡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이 공연을 지켜보던 '에그 음반사(Egg Records)' 관계자의 시선을 사로잡아 생애 처음으로 음반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러나 에그에서 발표한 소량의 싱글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져 갔으며 음반 계약 역시 흐지부지 파기되고 말았다.

에그 음반사와의 계약이 실패로 마무리 된 후 때를 기다리던 크리스 디 버그는 마침내 1974년에 대형 음반사인 'A&M 음반사(A&M Records)'와 정식으로 음반 계약을 하고 음반사의 후원으로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수퍼트램프(Supertramp)'의 'Crime of the Century' 순회 공연에 보조 출연자로 참가하여 팬들과 대형 무대에서 만날 기회를 잡게 된다. 수퍼트램프와의 공연을 마감한 후 크리스 디 버그는 1975년 2월에 데뷔 음반 'Far Beyond These Castle Walls'를 발표하였다.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무디 블루스(Moody Blues)'의 음악에 영향받아 제작된 데뷔 음반 'Far Beyond These Castle Walls'은 영국 차트 진입을 기대하며 발표한 음반이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팬들에게 외면 받았고 차트 진입에도 실패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싱글 차트 진입에 실패하며 히트 곡을 만들지 못한 크리스 디 버그는 의외의 나라에서 히트 곡을 만들게 되는데 바로 바다 건너 브라질에서 였다.

크리스 디 버그의 데뷔 음반에서 발매된 싱글 'Turning Round'가 17주 동안 브라질의 싱글 차트에서 정상에 머무르는 히트를 하였던 것이다. 이로인해 크리스 디 버그는 브라질에서 가수 겸 작곡가로써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된다. 데뷔 음반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후속 음반 작업을 서둘러 마친 크리스 디 버그는 1975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두번째 음반 'Spanish Train and Other Stories'을 발표하였다.

두번째 음반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하여 발매한 크리스마스 싱글 'A Spaceman Came Travelling'이 마침내 기다리던 영국 싱글 차트에 진입하였고 40위권 까지 진출하며 히트를 하게 된다. 천사 '가브리엘(Gabriel)'이 예수님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만든 곡인 'A Spaceman Came Travelling'은 우주선을 타고 온 외계인과의 조우, 그리고 외계인이 전하는 사랑과 평화의 음악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아름다운 곡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1977년에 세번째 음반 'At the End of a Perfect Day'를 발표한 크리스 디 버그는 이때 부터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여 공연 활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979년 크리스 디 버그는 네번째 음반 'Crusader'를 발표하였는데 이 음반은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Alan Parsons Project)'와 여러 차례 음반 작업을 했던 '앤드루 파웰(Andrew Powell)'이 제작을 담당하여 오케스트라 편곡과 합창단을 음반에 포함시켜 아름다운 소리를 창조해내었다.

네번째 음반의 수록 곡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팝팬들의 애청곡인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외에도 앤드루 파웰이 직접 피아노 연주를 들려 주고 있는 음반의 타이틀 곡 'Crusader'를 비롯하여 역시 앤드루 파웰의 피아노가 삽입된 곡들인 'Just In Time', 'Old-Fashioned People', 'You And Me'등 음반 대부분의 곡들이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크리스 디 버그 (Chris De Burgh) : 1948년 10월 15일 아르헨티나 베나도 뚜에르또 출생

갈래 : 팝 록(Pop/Rock), 소프트 록(Soft Rock),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cdeb.com/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 감상하기 : http://youtu.be/FRp_KGtdQpU

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Cat Stevens - Morning Has Broken

 

Cat Stevens - Morning Has Broken

1977년 12월에 회교도로 개종하면서 '유서프 이슬람(Yusuf Islam)'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현재는 유서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영국의 가수 겸 작곡가이자 다중 악기 연주자인 '캣 스티븐스(본명: Steven Demetre Georgiou)'는 런던의 샤프츠베리 애버뉴(Shaftesbury Avenue)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그리스 키프로스 섬 출신의 아버지와 스웨덴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새째 아들로 태어났다. 캣 스티븐스가 여덟살때 그의 부모는 이혼을 하였지만 식당은 부부 공동 명의로 계속 운영되어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고 성장하였다.

그리스 정교도였던 아버지와 스웨덴의 루터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캣 스티븐스는 카톨릭 학교인 세인트 조셉 로만 카톨릭 초등 학교(St. Joseph Roman Catholic Primary School)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즈음 부터 피아노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열다섯살 무렵인 1963년에는 영국의 팝계에 혜성 같이 등장하여 영국 팝계를 정복하기 시작한 '비틀즈(The Beatles)'의 음악을 듣고 감명을 받아 기타를 손에 들게 된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얻어 8파운드를 주고 생애 처음으로 구입한 기타로 연주를 하고 곡을 만들던 캣 스티븐스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거리 악사들의 음악을 듣기 위해 자주 인근의 거리를 찾기 시작했으며 이때 부터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된다. 지역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에는 만화 그리기에도 흥미를 느껴 '해머스미스 예술 학교(Hammersmith School of Art)'에서 1년 과정으로 만화 그리기를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 캣 스티븐스는 자신의 세번째 음반 'Mona Bone Jakon'에서 직접 표지를 그리게 된다.

또한 해머스미스 예술 학교에 다니던 1965년에 캣 스티븐스는 '스티브 아담스(Steve Adams)'라는 예명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음악 출판사와 계약하고 자신이 만든 노래인 'The First Cut Is the Deepest'를 출판사를 통해 공개하기도 하였다. 악보 출판 이후 캣 스티븐스는 밴드의 일원으로 커피 하우스와 선술집 등의 무대를 통해 계속 노래를 부르게 되었으나 이내 자신과 밴드가 맞지 않음을 깨닫고 솔로로 활동하게 된다. 솔로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스티브 아담스라는 이름 대신 캣 스티븐스로 바꾸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여자 친구가 캣 스티븐스의 눈이 고양이를 닮았다고 하는 말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열여덟살이 되던 1966년에 캣 스티븐스는 매니저이자 음반 제작자인 '마이크 허스트(Mike Hurst)'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여 음반사에 보내 음반 계약에 성공하게 된다. 프로그레시브 록 팬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레이블인 '데람 음반사(Deram Records')와 계약에 성공한 캣 스티븐스는 1966년에 데람을 통해서 데뷔 싱글 'I Love My Dog'을 발표하였다. 데뷔 싱글을 영국 싱글 차트에서 28위에 올려 놓은 캣 스티븐스는 1966년 12월에 두번째 싱글 'Matthew and Son'을 발표하여 영국 싱글 차트에서 2위 까지 진출시키는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1967년 3월에는 두곡의 히트 곡이 포함된 데뷔 음반 'Matthew and Son'을 발표하였으며 세번째 싱글로 'I'm Gonna Get Me a Gun'을 발표하여 싱글 차트에서 6위 까지 진출 시켰다. 캣 스티븐스는 성공적인 데뷔 음반 발표 이후 1967년 12월에 두번째 음반 'New Masters'를 발표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2년간의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2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건강을 회복한 캣 스티븐스는 1970년 7월에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던 세번째 음반 'Mona Bone Jakon'을 발표하면서 재기에 성공하였다.

네번째 음반인 'Tea for the Tillerman'은 1970년 11월에 발표되었는데 이 음반에서 싱글로 발매된 곡 'Wild World'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 진입하여 11위 까지 진출하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데뷔 싱글인 'I Love My Dog(118위)'과 'Matthew and Son(115위)'에 이어 세번째로 빌보드 싱글 차트에 진입한 곡이 20위권에 진입하였던 것이다. 싱글의 성공으로 이 음반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8위를 기록하였고 영국의 앨범 차트에서는 20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1971년 10월 캣 스티븐스는 다섯번째 음반인 'Teaser and the Firecat'를 발표하여 세곡의 빌보드 싱글 차트 히트 곡 'Moonshadow(30위)', 'Peace Train(7위)', 'Morning Has Broken(6위)'을 탄생시켰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2위 까지 진출한 이 음반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캣 스티븐스는 1972년 9월에 발표한 후속 음반 'Catch Bull at Four'로 마침내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서게 된다.

우리나라의 팝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인 'Morning Has Broken'은 19세기에 만들어진 찬송가로 1931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던 곡으로 캣 스티븐스에 의해 아름다운 포크 음악으로 재탄생하여 팝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곡이다.

캣 스티븐스 (Cat Stevens) : 1948년 7월 21일 영국 런던 출생

갈래 : 소프트 록(Soft Rock), 포크 록(Folk-Rock), 팝 록(Pop/Rock)
관련 웹 사이트 : http://www.yusufislam.org.uk/
Morning Has Broken 감상하기 : http://youtu.be/U5sSEkZ86ts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Linda Ronstadt - It's So Easy

 

Linda Ronstadt - It's So Easy

미국 애리조나 주 남쪽의 휴양 도시인 투손(Tucson)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린다 론스태드(본명: Linda Maria Ronstadt)'는 컨트리 팝을 비롯하여 포크, 리듬 앤 블루스, 재즈, 오페레타 등 다양한 갈래의 음악을 발표하며 활동하였고 1970년대 중반 부터 1980년 초 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수이다. 그녀가 1970년에 발표했던 곡인 'Long, Long Time'과 1977년 발표 곡인 'It's So Easy'는 팝팬들의 오랜 애청곡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1989년에 발표했던 소울 가수 '아론 네빌(Aaron Neville)'과의 듀엣 곡 'Don't Know Much'는 새로운 팬들을 만들기에 충분한 곡이었다.

린다 론스태드는 과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던 어머니와 기계 부품 사업을 하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명의 남자 형제와 여동생을 둔 린다 론스태드는 10에이커에 달하는 넓은 목장에서 성장하였으며 이들 가족은 1953년에 발행된 미국의 여성지인 '패밀리 서클(Family Circle)'에 소개가 되기도 하였다. 부족한 것이 없는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린다 론스태드는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에서 기타 주자인 '밥 키멀(Bob Kimmel)'을 만나면서 음악이라는 새로운 인생 항로를 향해 발을 내딛게 된다.

린다 론스태드가 대학에 다니고 있던 1960년대 중반의 미국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포크 록과 컨트리 록의 부흥 운동으로 새로운 흐름을 맞이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밥 키멀과 만난 린다 론스태드는 그와 듀오로 포크 음악들을 노래하며 새로운 흐름에 일조하게 된다. 밥 키멀과의 활동이 만족스러웠던 린다 론스태드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그와 함께 로스 앤젤레스로 옮겨 가서 새로운 음악 동지인 '케니 에드워즈(Kenny Edwards)'를 만나 포크 트리오인 '스톤 포니스(The Stone Poneys)'를 1965년에 결성하였다.

린다 론스태드는 스톤 포니스의 일원으로 1967년 1월 30일에 발표한 데뷔 음반 'The Stone Poneys'를 시작으로 6월에 발표한 두번째 음반 'Evergreen, Volume 2'와 1968년에 발표한 세번째 음반이자 트리오의 마지막 음반인 'Linda Ronstadt, Stone Poneys and Friends, Vol. III' 까지 참여한 후 솔로 활동을 위해 트리오에서 탈퇴하게 된다. 스톤 포니스 음악의 연장선상에 있는 음반 'Hand Sown ... Home Grown'을 1969년 3월에 발표하면서 솔로 가수로 데뷔한 린다 론스태드는 우리나라 팝팬들의 애청 곡인'Long, Long Time'이 수록되어 있는 두번째 음반 'Silk Purse'를 1970년 3월에 발표하였다.

컨트리 음악을 시도한 두번째 음반 'Silk Purse'로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03위를 기록한 린다 론스태드는 이 시기에 '도어스(The Doors)'나 닐 영(Neil Young), 그리고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 같은 유명 가수들과 함께 활발한 공연 활동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1971년에 포크 록을 시도한 음반 'Linda Ronstadt(163위)'를 발표한 린다 론스태드는 1973년에 네번째 음반 'Don't Cry Now(45위)'를 발표하여 그룹 '이글스(The Eagles)'의 '돈 헨리(Don Henley)'와 '글렌 프레이(Glenn Frey)'가 만든 곡인 'Desperado'를 시작으로 'Love Has No Pride'와 'Silver Threads and Golden Needles'를 빌보드 싱글 차트에 진입시키면서 히트를 시켰다.

1974년 11월에 린다 론스태드는 자신의 출세작인 다섯번째 음반 'Heart Like a Wheel'을 발표하였다. 이 음반에서 싱글로 발매된 'You're Not Good'이 발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대형 히트를 하였고 이어진 두번째 싱글 'When Will I Be Loved'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2위 까지 진출하였다. 세번째 싱글 'It Doesn't Matter Anymore'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47위 그쳤으나 두 곡의 대형 히트 곡으로 린다 론스태드의 음반 'Heart Like a Wheel'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정상에 올랐으며 51주간이나 앨범 차트에 머무르게 된다.

이 음반으로 대형 인기 가수의 대열에 합류한 린다 론스태드는 이후 여자 가수로써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75년 9월에 발표한 음반 'Prisoner in Disguise'는 앨범 차트에서 4위 까지 진출하였고 1976년 8월에 발표한 음반 'Hasten Down the Wind'는 앨범 차트에서 3위를 기록하며 히트 행진을 이어갔다. 히트 곡 'It's So Easy'가 수록된 음반 'Simple Dreams'를 1977년 9월에 발표한 린다 론스태드는 이 음반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또 다시 1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1978년 9월에 발표한 음반 'Living in the USA'에서는 'Back in the U.S.A.'와 'Ooh Baby Baby'를 히트시키면서 2연속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 즈음 부터 린다 론스태드에게는 '록의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 of Rock)'나 '록의 여왕(Queen of Rock)'이라는 호칭이 따라 다니게 된다. 그래미 상을 10회나 수상하며 음악성을 인정 받았던 린다 론스태드는 1976년의 그래미 상에서 'Heart Like a Wheel' 음반에 수록되었던 곡인 'I Can't Help It (If I'm Still In Love With You)'로 '최우수 컨트리 여자 가수상(Best Country Vocal Performance Female)'을 수상하면서 생애 첫 그래미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었다.

린다 론스태드 (Linda Ronstadt) : 1946년 7월 15일 미국 애리조나 출생

갈래 :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 소프트 록(Soft Rock), 팝 록(Pop/Rock)
관련 웹 사이트 : http://ronstadt-linda.com/
It's So Easy 감상하기 : http://youtu.be/_AtnfDo4PE8
Long, Long Time 감상하기 : http://youtu.be/gG4lsjSY_vk
Don't Know Much 감상하기 : http://youtu.be/soO0CMnU9Bo

2010년 11월 2일 화요일

Barry Manilow - Some Kind Of Friend

 

Barry Manilow - Some Kind Of Friend

본명이 '베리 알란 핀커스(Barry Alan Pincus)'인 미국 출신의 가수이자 작곡가이며 음반 제작자로 유명한 배리 매닐로우는 뉴욕의 '줄리아드 학교(Juilliard School)'에서 클래식을 공부하다 팝 음악으로 방향을 바꾸어 성공의 열매를 움켜쥔 가수이다. 유대인인 배리 매닐로우는 아버지가 두살때 가족을 버리고 떠나 버리는 바람에 어머니인 '에드너 매닐로우(Edna Manilow)'와 함께 살아야 했는데 이 때문에 이름도 어머니의 처녀적 성인 매닐로우를 물려 받아 사용하게 된다.

일곱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배리 매닐로우는 뉴욕시 브루클린(Brooklyn)에 있었던 '이스턴 디스트릭트 고등학교(Eastern District High School, 1995년 폐교)'를 졸업한 1961년 부터 '줄리아드 학교(Juilliard School)'에 입학하여 클래식 음악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배리 메닐로우는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CBS 방송국(Columbia Broadcasting System)'에서 아르바이트를 자리를 구해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해야 했다.

그러던 1964년에 배리 매닐로우는 방송국에서 뮤지컬 감독 '브로 헤로드(Bro Herrod)'를 만나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 배리 매닐로우는 새로운 음악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평소 범상치 않았던 배리 매닐로우의 작곡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던 브로 헤로드는 자신이 무대에 올릴 예정인 뮤지컬 'The Drunkard'에 사용될 음악들을 그동안 늘 염두에 두고 있던 배리 매닐로우에게 다듬어 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배리 매닐로우는 브로 헤로드의 부탁을 받아들여 뮤지컬에 사용될 모든 곡을 새롭게 만들어서 건네주게 된다.

이렇게해서 뉴욕의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 브로드웨이 바깥에 있는 전문 소극장)' 무대에 올려진 뮤지컬 'The Drunkard'는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며 8년간 장기 공연되었다. 이로 인해 배리 매닐로우는 음악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뮤지컬 작업으로 자신감을 얻은 배리 매닐로우는 본격적으로 팝 음악에 뛰어들어 피아노 연주자와 음반 제작자, 편곡자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70년 부터는 광고 음악에도 눈을 돌려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인 1971년에는 당시 막 데뷔를 준비중이던 신인 가수 '베트 미들러(Bette Midler)'를 만나 그녀의 1972년 데뷔 음반 'The Divine Miss M'과 1973년에 발표했던 두번째 음반 'Bette Midler'에서 피아노 연주와 프로듀서로 음반 작업에 참가하여 베트 미들러를 인기 가수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한편 베트 미들러의 'The Divine Miss M'의 순회 공연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던 배리 매닐로우는 그후에도 그녀와 함께 공연 활동을 했으며 둘의 이러한 관계는 1975년 까지 이어지게 된다.

배리 매닐로우는 베트 미들러와의 음악 작업과는 별개로 자신의 음반 데뷔를 준비하여 1973년 7월 7일에 데뷔 음반 'Barry Manilow I'을 발표하면서 솔로 가수로 데뷔하였다. 배리 매닐로우는 자신의 데뷔 음반을 빌보드 앨범 차트 28위에 올려 놓으며 성공적인 데뷔를 했고 이듬해인 1974년 10월에 두번째 음반 'Barry Manilow II'를 발표하였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9위에 올랐던 두번째 음반에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배리 매닐로우에게 성공 시대를 열어주었던 곡 'Mandy'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곡은 미국 가수인 '스코트 잉글리시(Scott English)'가 1971년에 발표하여 히트 시켰던 곡 'Brandy'를 편곡하여 제목을 살짝 바꾸어 수록한 곡이었다.

싱글 'Mandy'의 성공 이후 배리 매닐로우는 두번째 싱글인 'It's a Miracle'을 빌보드 싱글 차트 12위에 올려 놓으며 인기 행진을 이어 갔다. 1975년에 발표한 세번째 음반 'Tryin' to Get the Feeling'에서는 'Mandy'에 이어 다시 한번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한 곡인 'I Write the Songs'을 배출하였으며 두번째 싱글인 'Tryin' to Get the Feeling Again'은 빌보드 싱글 차트 10위에 진출시키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76년 음반 'This One's for You'에서도 두 곡의 히트 싱글 'Looks Like We Made It(1위)'과 'Weekend in New England(10위)'를 배출했던 배리 매닐로우는 이 음반에 수록된 'Daybreak'의 라이브 버전을 싱글로 발표하여 빌보드 싱글 차트 23위에 올려 놓았다. 배리 매닐로우는 1978년에 음반 'Even Now'를 발표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인 'Can't Smile Without You(3위)'를 시작으로 'Copacabana(8위)'와 'Somewhere in the Night(9위)'를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3백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를 하게 된다.

1979년에 발표한 음반 'One Voice'에서는 'I Don't Want to Walk Without You(36위)'와 'When I Wanted You(20위)'를 히트시켰으며 1980년 음반 'Barry'에서는 'I Made It Through the Rain(10위)'과 'Lonely Together(45위)'를 히트시켰다. 이어진 1981년 음반 'If I Should Love Again'을 통해 'The Old Songs(15위)', 'Let's Hang On(32위)', 'Somewhere Down the Road(21위)'등 세곡을 히트시킨 배리 매닐로우는 1982년에 음반 'Here Comes the Night'을 발표하였으나 이 음반에서는 'Memory(39위)'만이 차트에 진입하면서 부진에 빠져들게 된다.

비록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Here Comes the Night' 음반에는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경쾌한 리듬의 곡 'Some Kind Of Friend'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곡은 그 경쾌함으로 인해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애청곡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편 배리 매닐로우가 2005년에 발표했었던 음반 'The Essential Barry Manilow'에는 앞서 언급한 곡들 외에도 배리 매닐로우가 차트에 진출시켰던 모든 곡들이 두장의 시디에 포함되어 있어 그의 발자취를 하나 하나 더듬어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른바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음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배리 매닐로우 (Barry Manilow) : 1946년 6월 17일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Brooklyn) 출생

갈래 :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 소프트 록(Soft Rock), 팝 록(Pop/ Rock), AM 팝(AM Pop)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manilow.com/
Some Kind Of Friend 감상하기 : http://youtu.be/3c-35YPi6hM

2010년 10월 6일 수요일

Simon & Garfunkel - Bridge Over Troubled Water

 

Simon & Garfunkel - Bridge Over Troubled Water

1990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이름이 올랐던 너무도 유명한 미국의 포크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은 뉴저지(New Jersey)주 뉴어크(Newark)에서 태어난 폴 사이먼과 뉴욕의 포레스트힐스(Forest Hills)에서 태어난 아서 가펑클에 의해서 결성된 포크 듀오 '톰 앤 제리(Tom & Jerry)'에서 출발하였다. 뉴욕 퀸스(Queens)구의 주거 지역인 포레스트힐스에서 살고 있던 폴 사이먼과 아서 가펑클은 1953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만났으며 친구로 함께 성장하게 된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에 학예회 수준의 연극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Alice in Wonderland)'에서 각각 흰 토끼역(폴 사이먼)과 체셔 고양이역(아서 가펑클)을 맡으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이후 두사람은 나란히 같은 중,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는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둘은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5년 부터 듀오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포레스트힐스 고등학교(Forest Hills High School)에 진학한 폴 사이먼과 아서 가펑클은 1957년에 톰 앤 제리라는 이름으로 첫번째 싱글 음반 'Hey, Schoolgirl'을 발표하면서 장식 가수로 데뷔하였다.

톰 앤 제리의 데뷔 싱글은 가벼운 로큰롤 형식의 곡으로 십만장이 넘게 팔려 나가며 빌보드 차트에서 49위 까지 진출하는 히트를 하게 된다. 하지만 데뷔 싱글의 히트 후 별다른 히트 곡을 만들지 못하면서 두 사람은 톰 앤 제리의 활동 대신에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이로써 이들 듀오의 활동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폴 사이먼은 '퀸스 대학교(Queens College)'에 진학하였으며 아서 가펑클은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에 진학하면서 톰 앤 제리는 자연히 해산하게 된다.

듀오는 해산했지만 각자의 관심사였던 음악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두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학업과 병행하여 틈틈히 곡을 만들던 폴 사이먼은 대학을 졸업한 1963년 부터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서 포크 음악을 연주하며 음악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으로 아서 가펑클에게 함께 포크 듀오로 활동하자고 제의하게 된다. 톰 앤 제리가 아닌 사이먼 앤 가펑클로 1964년에 다시 뭉친 두 사람은 곧 이어 '컬럼비아 음반사(Columbia Records)'와 계약하고 그해 3월에 녹음실로 들어가 데뷔 음반을 녹음하게 된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데뷔 음반은 1964년 10월 19일에 'Wednesday Morning, 3 A.M.'이라는 제목을 달고 공개되었다. 하지만 사이먼 앤 가펑클의 야심찬 데뷔 음반은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채 실패로 마감되었고 폴 사이먼은 솔로 활동을 위해 영국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폴 사이먼이 1965년 8월에 런던에서 솔로 음반 'The Paul Simon Songbook'을 발표할 즈음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데뷔 음반에 수록되었던 'The Sounds of Silence'의 새로운 편곡 버전이 라디오를 시작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히트 곡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The Sounds of Silence'의 새로운 버전은 음반 제작자였던 '톰 윌슨(Tom Wilson)'이 '버즈(The Byrds)'와 '밥 딜런(Bob Dylan)'의 전기 기타 음향에서 영감을 얻어 다중 녹음(Overdubbing) 방식으로 전기 기타를 비롯한 악기들을 삽입하여 1965년 9월에 싱글로 발매하였던 곡으로 1966년 새해 첫날에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전기 장치 악기들을 이용하여 새롭게 편곡된 'The Sounds of Silence'의 성공은 사이먼 앤 가펑클에게 포크 록의 성공 가능성을 제시하여 주었으며 향후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The Sounds of Silence'의 히트를 계기로 영국에서 돌아온 폴 사이먼은 아서 가펑클과 재결합하여 사이먼 앤 가펑클로 새 음반을 준비하게 된다. 포크 록으로 재무장한 사이먼 앤 가펑클은 1966년 1월 17일에 두번째 음반 'Sounds of Silence'를 발표하여 음반의 타이틀 트랙과 폴 사이먼의 솔로 음반 'The Paul Simon Songbook'에 첫번째 트랙으로 수록되었었던 곡을 새롭게 편곡한 'I Am a Rock'을 히트시키며 성공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21위에 올랐던 음반 'Sounds of Silence' 다음에 발표된 음반은 히트 곡 'Scarborough Fair'가 수록된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으로 1966년 10월에 발표되어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4위를 기록하게 된다. 1968년 4월에 'Mrs. Robinson'이 수록된 음반 'Bookends'로 마침내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서게 된 사이먼 앤 가펑클은 1970년 1월 16일에 위대한 명반으로 표현되는 음반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발표하였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다섯번째 음반이자 마지막 음반이기도 한 이 음반은 타이틀 곡을 포함하여 'El Condor Pasa (If I Could)', 'Cecilia', 'The Boxer'등을 히트시키며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자리에 10주간이나 머무르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듀오의 역작이자 명반인 이 음반을 끝으로 그동안 조금씩 균열을 보이던 사이먼 앤 가펑클은 정식으로 해산하고 각자 솔로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사이먼 앤 가펑클은 해체 후에도 가끔씩 한자리에 모여 함께 노래 부르는 모습을 팬들에게 선사하고는 했는데 그중 백미가 바로 그 유명한 1981년의 자선 공연이었다. 1981년 9월 19일에 뉴욕의 '센트럴파크(Central Park)'에서 열린 사이먼 앤 가펑클의 자선 공연에는 5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사이먼 앤 가펑클이 남긴 역대 최고의 무대가 되었으며 이 날의 공연 실황은 음반으로 발매되어 인기 상품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사이먼 앤 가펑클 (Simon & Garfunkel) :
폴 사이먼 (Paul Simon) : 1941년 10월 13일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 출생
아서 가펑클 (Arthur Garfunkel) : 1941년 11월 5일 미국 뉴욕 포레스트힐즈 출생

갈래 : 포크 록(Folk-Rock), 소프트 록(Soft Rock), AM 팝(AM Pop)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simonandgarfunkel.com/
관련 동영상 감상하기 : http://youtu.be/GYKJuDxYr3I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Captain & Tennille - Do That To Me One More Time

 

Captain & Tennille - Do That To Me One More Time

닐 세다카의 1973년 곡을 커버한 'Love Will Keep Us Together'를 1975년에 데뷔 싱글로 발표하여 2백 50만장 이상을 판매하였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여 유명해진 부부 듀오 '캡틴 앤 테닐'은 대형 히트를 기록한 데뷔 싱글로 인해 1976년 초에 진행된 '그래미 상(Grammy Award)'에서 '올해의 음반(Record of the Year)'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73년 9월에 정식 결성된 캡틴 앤 테닐의 토니 테닐은 앨라배마(Alabama)주 몽고메리(Montgomery)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프랭크 테닐(Frank Tennille)'은 '클라크 랜달(Clark Randall)'이라는 예명으로 빅밴드인 '밥 크로스비(Bob Crosby)'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던 가수였으며 그녀의 어머니인 '캐서린 테닐(Cathryn Tennille)'은 몽고메리 지역에서 주간에 방영되던 텔레비전 토크 쇼의 진행자로 텔레비전 토크 쇼의 개척자라는 평을 듣는 여성이었다.

이런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부터 연예계 진출을 당연시 하며 자랐던 토니 테릴은 클래식 피아노를 배우는 한편으로 제인(Jane)과 루이사(Louisa), 그리고 멜리사(Melissa)라는 이름을 가진 세명의 자매들과 함께 보컬 그룹을 결성하여 어머니의 텔레비전 쇼에 몇차례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앨라배마주의 '어번 대학교(Auburn University)'에 진학한 토니 테릴은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면서 교내에서 활동하던 빅밴드인 어번 나이츠(The Auburn Knights)에 보컬리스트로 가입하여 음악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에 캘리포니아로 온 토니 테릴은 드러머인 '케네스 시어러(Kenneth Shearer)'와 결혼하고 '사우스코스트 레퍼토리(South Coast Repertory)' 극단에 들어가게 된다. 1971년에 공동 작업으로 만든 록 뮤지컬 '마더 어스(Mother Earth)'를 무대에 올린 토니 테릴은 공연에서 키보드를 담당할 연주자를 공개 모집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대릴 드래곤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르게 된다.

대릴 드래곤은 지휘자 '카르멘 드래곤(Carmen Dragon)'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터 여러 악기들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가 주로 다루었던 악기는 키보드였다. 대릴 드래곤의 형인 '데니스 드래곤(Dennis Dragon)'은 1960년대에 활동했던 팝 캄보(Combo: 소규모 재즈 악단) 밴드 '드래곤스(The Dragons')에서 활동하였으며 대릴 드래곤도 1962년 부터 '찰스 라이트 & 라이트 사운즈(Charles Wright & the Wright Sounds)'에 가입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1971년에는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의 음반 'Surf's Up' 순회 공연에 키보드 주자로 참가하여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대릴 드래곤은 늘 머리에 선원 모자를 쓴 채로 무대에 올라 연주를 하였다. 이 모습을 본 비치 보이스의 '마이크 러브(Mike Love)가' 그에게 캡틴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게 된다. 비치 보이스와의 순회 공연이 마무리 되자 대릴 드래곤은 토니 데릴의 록 뮤지컬 '마더 어스(Mother Earth)'에서 키보드를 연주하게 되는데 여기서 운명의 동반자가 될 토니 데릴을 만나게 된다.

뮤지컬 공연이 끝나자 대릴 드래곤은 토니 테릴을 비치 보이스의 다음번 순회 공연에 참가시키게 되는데 둘은 이때 부터 함께 활동하게 된다. 1972년에 케네스 시어러와 이혼한 토니 테릴은 대릴 드래곤과 듀오로 활동하기로 하고 음반 계약을 추진하게 된다. 마침내 1973년에 'A&M 음반사(A&M Records)'와 듀오로 계약하게 된 캡틴 앤 테닐은 싱글 'The Way I Want to Touch You'를 녹음하였으나 발표가 미루어졌으며 대신 나중에 녹음된 닐 세다카의 커버 곡 'Love Will Keep Us Together'가 1975년에 데뷔 싱글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캡틴 앤 테닐의 데뷔 싱글은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에서 9주간 1위 자리를 지키며 대형 히트를 하였고 캡틴 앤 테닐은 이 싱글로 그래미 상 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1975년 11월 11일 대릴 드래곤과 토니 테릴은 결혼을 하여 부부 듀오가 되었으며 공개가 미루어졌던 싱글 'The Way I Want to Touch You'를 두번째 싱글로 발표하였다. 캡틴 앤 테닐의 두번째 싱글은 빌보드 싱글 차트 에서 4위를 차지하며 데뷔 싱글의 뒤를 잇는 히트 행진을 이어가게 된다.

이후 'Lonely Night (Angel Face)', 'Shop Around', 'Muskrat Love', 'You Never Done It Like That' 등을 히트 시킨 캡틴 앤 테닐은 1979년에 'Do That to Me One More Time'을 발표하였다. 1979년 음반 'Make Your Move'에 수록된 이 싱글은 음반 표지 사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한번만 더 해 주세요, 당신같은 남자와 한번으로는 부족하잖아요.' 라는 노골적인 가사로 시작하고 있는데 싱글로 발표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1975년에 이어서 두번째로 차트 정상을 차지한 'Do That to Me One More Time'은 우리나라에서도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곡은 우리나라에서 방공 금지 곡 처분을 받지 않은 채 자주 라디오의 팝 프로그램에서 방송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금지 곡이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캡틴 앤 테닐 (Captain & Tennille) :
대릴 드래곤 (Daryl Dragon, 키보드) : 1942년 8월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생
토니 테릴 (Toni Tennille, 보컬) : 1940년 5월 8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출생

갈래 : 어덜트 컨템퍼러리(Alternative Rock), AM 팝(AM Pop), 소프트 록(Soft Rock)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captainandtennille.net/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James Taylor - Fire And Rain

 

James Taylor - Fire And Rain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보스턴(Boston)의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에서 태어난 미국의 가수 겸 작곡가이자 기타 주자인 '제임스 테일러'는 혼란스러운 사이키델릭 사운드가 주류를 이루던 1960년대가 마감되고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신선한 바람을 몰고 등장한 가수이다. 통기타 하나를 들고 팝계에 등장하여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며 싱어송라이터의 대표 주자가 된 제임스 테일러는 데뷔 이후 잔잔하게 퍼지는 포근한 목소리와 정감있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팝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제임스 테일러가 세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노스캐롤라이나 의과 대학(University of North Carolina School of Medicine)의 조교수로 부임하게 되어 가족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카보로(Carrboro)로 이사하게 되었고 제임스 테일러는 카보로에서 성장하게 된다. 어릴때 처음으로 배운 악기는 첼로(Cello)였으나 십대가 되면서 기타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결국 1960년 부터는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제임스 테일러는 1961년 가을에 아이비 리그 대학 진학률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기숙 학교인 밀튼 아카데미(Milton Academy)에 진학하였으며 이듬해 여름에는 고급 휴양지인 마서즈 빈야드(Martha's Vineyard)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떠났다가 뉴욕에서 온 기타 주자 '대니 코치머(Danny Kortchmar)'를 만나게 된다. 둘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에 곧바로 친해졌고 블루스 음악과 포크 음악들을 연주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국 두사람은 1963년에 포크 듀오 '제이미 앤 쿠치(Jamie & Kootch)'를 결성하여 커피하우스를 무대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학업을 등한시하고 음악 활동에 전념하면서 성적이 떨어진 제임스 테일러는 밀튼 아카데미에서 나와서 채플 힐 고교(Chapel Hill High School)에 편입하여 한학기를 다니게 된다. 이 즈음 제임스 테일러는 동생인 '알렉스 테일러(Alex Taylor)'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기도 하는데 이 밴드의 이름은 '코세이어스(The Corsayers)'였다. 코세이어스에서 전기 기타를 담당했던 제임스 테일러는 자신이 만든 곡 'Cha Cha Blues'를 밴드의 싱글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밴드 활동을 하면서도 채플 힐 고교에서 한학기를 무사히 마친 제임스 테일러는 밀튼 아카데미로 돌아가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제임스 테일러는 우울증에 걸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1965년에 스스로 매클린 병원(McLean Hospital)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된다. 1966년에 병원에서 퇴원한 제임스 테일러는 대니 코치머와 함께 뉴욕으로 가서 밴드 '플라잉 머신(Flying Machine)'을 결성하였다.

플라잉 머신은 제임스 테일러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에 만든 'Don't Talk Now'와 'Knocking 'Round the Zoo'등을 연주하며 무대에 섰고 1966년 여름에는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있는 나이트 아울 카페(Night Owl Cafe)에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임스 테일러가 이 즈음 부터 헤로인 중독에 빠져 들기 시작했고 거기에 더해 플라잉 머신이 '주빌리 음반사(Jubilee Records)'를 통해 1966년 말에 발표한 싱글 'Brighten Your Night with My Day'가 차트에서 102위에 그치는 부진에 빠지자 주빌리로 부터 더 이상의 음반 발매를 거부당하게 된다.

결국 플라잉 머신은 해체의 수순을 밟아야 했고 제임스 테일러는 솔로 활동을 위해 1967년에 런던 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런던에서 비틀즈(The Beatles) 소유의 '애플 음반사(Apple Records)'와 계약한 제임스 테일러는 싱글 'Carolina in My Mind'를 발표한 후 1968년 12월에 애플 음반사를 통해 데뷔 음반 'James Taylor'를 발표하였다. 영국인이 아닌 미국인으로써는 처음으로 애플 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발표한 가수가 된 제임스 테일러였지만 음반에서 발매된 싱글 'Carolina in My Mind'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18위에 오르는데 그치며 결과적으로 데뷔 음반은 실패한 음반이 되고 말았다.

데뷔 음반은 실패로 마감되었지만 제임스 테일러는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 7월 20일에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port Folk Festival)'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게 된다. 수천명의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빗속에서 진행된 제임스 테일러의 무대를 관중들은 끝까지 지켜봐주었고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주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1969년 10월에 '워너 브라더스 음반사(Warner Bros. Records)'와 음반 계약에 성공한 제임스 테일러는 그해 12월에 캘리포니아에서 두번째 음반의 녹음에 들어가게 된다.

1970년 2월에 공개된 제임스 테일러의 두번째 음반은 'Sweet Baby James'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으며 싱글로 발매된 'Fire And Rain'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 진입하여 3위 까지 오르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1988년 영화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에 삽입되기도 했던 히트 곡 'Fire And Rain'은 제임스 테일러가 런던에서 막 애플과 계약하고 데뷔 음반을 준비중이던 때에 미국에서 사망한 그의 여자 친구 '수잔(Suzanne)'을 추억하는 마음과 우울증과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들게 버텨왔던 자신의 심정을 담아 만든 노래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팝팬들이 사랑하는 곡이기도 하다.

한편 수잔의 비극적인 사고 소식이 제임스 테일러의 음반 작업에 지장을 줄까 우려한 친구들이 데뷔 음반 작업이 모두 끝날 때 까지 사고 소식을 알려주지 않아 제임스 테일러는 음반 녹음이 모두 끝난 뒤에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제임스 테일러 (James Taylor) : 1948년 3월 12일 미국 보스턴 출생

갈래 : 팝 록(Pop/Rock),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 소프트 록(Soft Rock)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jamestaylor.com/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Carole King - You've Got a Friend

Carole King - You've Got a Friend

1971년에 발표한 음반 'Tapestry'를 1977년 까지 무려 6년간 빌보드 앨범 차트에 머물게 하며 1천 5백만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하여 1970년대를 통털어 솔로 가수로는 최다 음반 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가수이자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캐롤 킹(본명: Carol Klein)'은 1942년에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브루클린에서 성장하며 네살때 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노래 부르는 것을 즐겨하는 소녀로 십대를 맞이한 캐롤 킹은 뉴욕 미드우드(Midwood)의 제임스 매디슨 고등학교(James Madison High School)에 진학하여서는 4인조 보컬 그룹 '코사인(Co-Sines)'을 결성하게 된다.

생기발랄한 십대였던 캐롤 킹은 전화번호부를 뒤지다 킹(King)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이때 부터 본명 대신 캐롤 킹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서며 밴드 활동을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의 퀸즈 대학교(Queens College)에 진학한 캐롤 킹은 같은 과의 '닐 세다카(Neil Sedaka)'를 만나게 되는데 둘은 처음에 사이 좋은 친구로 지내다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캐롤 킹은 퀸즈 대학교에서 '폴 사이먼(Paul Simon)'과 '제리 고핀(Gerry Goffin)'을 만나 자주 어울리며 절친한 친구 사이로 우정을 나누게 된다.

특히 제리 고핀과는 같이 노래를 만들면서 서로의 취향이 비슷함을 발견하고 1959년 부터 함께 작곡 팀을 이루어 '브릴 빌딩(Brill Building)'에 입주해 있던 음악 관련 출판사 '알던 뮤직(Aldon Music)' 소속으로 작곡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즈음 가수로 데뷔하여 싱글 음반을 발표하면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가수 닐 세다카(Neil Sedaka)가 캐롤 킹에게 바치는 연가 'Oh! Carol'을 1959년에 발표하여 빌보드 차트 9위에 올려 놓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닐 세다카의 성공을 지켜 본 캐롤 킹은 그에게 화답하는 형식의 노래 'Oh! Neil'을 1959년 말에 발표하였지만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하였다. 이미 이 당시 캐롤 킹은 함께 작업하던 제리 고핀과 연인 사이로 발전한 관계였기에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은 1960년에 걸그룹 '셔렐스(The Shirelles)'에게 'Will You Love Me Tomorrow'라는 곡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면서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은 작곡가로써의 명성을 날리게 되며 이후 두사람은 공동으로 많은 히트 곡을 만들게 된다.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은 1960년 9월에 결혼하여 1968년에 이혼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만들어낸 히트 곡이 무려 서른 곡에 이를 정도로 대단한 실적을 남겼다. 또한 이들 부부는 1960년대 중반에는 투모로우 음반사(Tomorrow Records)를 설립하여 '마이들 클래스(Myddle Class)'라는 밴드와 음반 계약을 맺기도 하였다. 캐롤 킹은 제리 고핀과 이혼한 후 마이들 클래스의 베이스 주자 '찰스 라르키(Charles Larkey)'와 결혼하였으며 가수 활동 재개를 위해 기타 주자인 '대니 코치머(Danny Kortchmar)'와 남편과 함께 '시티(The City)'라는 이름의 3인조 팝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하지만 시티가 1969년에 발표한 음반 'Now That Everything's Been Said'는 기대 이하의 초라한 성적만을 남기며 조용히 묻혀 버렸다. 시티를 해산한 캐롤 킹은 1970년에 솔로 가수로 데뷔 하게 되는데 'Writer'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음반에는 시티의 멤버들이 그대로 참여하였고 가수 겸 작곡가인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가 합류하여 어쿠스틱 기타를 들려주고 있다. 1971년 1월 30일 역사적인 음반 'Tapestry'가 캐롤 킹의 두번째 음반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데뷔 음반에 참가했던 시티의 두 멤버들과 제임스 테일러가 다시 참가한 이 음반은 오랜기간 팝팬들의 인기 상품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싱글로 발매된 'It's Too Late'와 'I Feel the Earth Move'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정상에 오르는 히트를 기록하였다. 한편 같은 해 4월에 제임스 테일러가 자신의 솔로 음반 'Mud Slide Slim and the Blue Horizon'에 'Tapestry' 음반에 수록되었던 캐롤 킹의 곡 'You've Got a Friend'를 새롭게 해석하여 수록하였는데 이 곡이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안게 된다.

캐롤 킹 (Carole King) : 1942년 2월 9일 미국 뉴욕 출생

갈래 : 팝 록(Pop/Rock),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 소프트 록(Soft Rock)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caroleking.com/home.php

2010년 8월 23일 월요일

Bette Midler - The Rose

 

Bette Midler - The Rose

미국의 가수 겸 영화배우인 '베트 미들러'는 뉴저지(New Jersey)주 페이터슨(Paterson)에서 태어나 하와이의 호놀룰루(Honolulu)에서 성장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베트 미들러의 부모가 뉴저지주 페이터슨에서 하와이의 호놀룰루로 이사할 무렵에 이미 그녀의 어머니가 베트 미들러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하며 하와이로 이사온 얼마 후 베트 미들러를 출산하였다고도 알려져 있다. 베트 미들러의 부모는 태어난 딸에게 여배우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의 이름을 따서 베트 미들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나 베티 데이비스와는 달리 베티가 아닌 베트로 발음하여 차별을 주기도 하였다.

이름 때문인지 어릴때 부터 영화 배우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던 베트 미들러는 호놀룰루의 '래드포드 고등학교(Radford High School)'를 졸업하고 '하와이 대학교(University of Hawaii)'의 드라마 학과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미래의 배우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넉넉치 못했던 가정 형편으로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베트 미들러는 학업보다는 자신의 꿈인 영화 배우로 성공하기 위한 발판 마련을 위해 1965년 여름에 뉴욕으로 와서 이듬해에 개봉 예정인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이처럼 베트 미들러는 대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1966년 10월 10일에 개봉되었던 영화 '하와이(Hawaii)'를 통해 처음 영화계에 데뷔하였는데, 당시 그녀가 맡았던 역할은 하와이로 오는 배의 승객역이었다. 영화 출연 후 베트 미들러는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Off-Off-Broadway: 객석 규모 300석 미만의 소극장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공연되던 극작가 '톰 아이언(Tom Eyen)'의 작품 'Miss Nefertiti Regrets'와 'Cinderella Revisited'에 출연하며 프로 배우로써 첫걸음을 떼게 된다.

1966년 부터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에 출연을 시작하여 1969년  까지 장기간 무대에 오르며 그녀의 배우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 주었지만 불행히도 이 기간 동안 베트 미들러의 공연을 보러 뉴욕에 온 그녀의 여동생이 택시에 치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70년 여름 부터는 뉴욕의 게이(Gay) 클럽인 '컨티넨털 베쓰(Continental Baths)'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베트 미들러의 노래를 피아노로 반주했던 인물이 '베리 매닐로우(Barry Manilow)'였다. 컨티넨털 베쓰에서 베트 미들러를 만난 베리 매닐로우는 후일 그녀의 데뷔 음반에도 참여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다.

베트 미들러는 1971년에 '시애틀 오페라단(Seattle Opera Production)' 소속으로 록 오페라 '토미(Tommy) '무대에 오르며 인기를 얻었고 텔레비전의 심야 토크 쇼 프로그램인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에도 출연하게 된다. 한편 록 오페라 무대에서의 인기와 더불어 이루어진 텔레비전 출연은 베트 미들러에게 애틀란틱 음반사(Atlantic Records)와의 음반 계약을 가져다 주었다.

1972년 11월 애틀란틱 음반사를 통해 베트 미들러는 자신의 가수 데뷔 음반 'The Divine Miss M'을 발표하였다. 앞서 말한대로 이 음반에는 베리 매닐로우가 참가하여 피아노 연주를 해주고 있다. 베트 미들러의 데뷔 음반에서 발매된 세곡의 싱글 'Do You Want To Dance?', 'Friends', 'Boogie Woogie Bugle Boy'는 연속해서 히트를 하며 데뷔 음반을 빌보드 앨범 차트에 견인하여 9위 까지 진출시켰고 음반 판매량에서도 백만장이 넘는 판매를 기록하는 대형 히트를 하였다.

이로인해 1973년초에 진행된 '그래미 상(Grammy Award)'에서 베트 미들러는 '최우수 신인상(Best New Artist)'을 수상하게 된다. 성공적으로 가수 데뷔를 한 베트 미들러는 약물 중독으로 1970년에 스물 일곱살의 나이로 타계한 여성 록 가수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을 모델로 만들어진 1979년 영화 '로즈(The Rose)'에 주인공인 '메리 로즈 포스터(Mary Rose Foster)'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1979년 11월에 개봉된 영화 로즈에서 주인공을 맡은 베트 미들러는 사운드 트랙 음반에도 참가하여 리드 보컬로 수록 곡 모두를 불렀는데, 이 사운드 트랙 음반은 1980년 2월 15일에 발표되었다. 이 음반에서 '퍼시 슬레이지(Percy Sledge)'의 곡을 커버한 'When a Man Loves a Woman'이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에서 35위에 올랐고 영화의 주제가인 'The Rose'는 싱글 차트에서 3위에 오르며 히트를 하였다.

또한 '빌보드 컨트리 싱글 차트(Billboard Hot Country Singles)'에서는 1위에 올랐던 곡 'The Rose'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팝팬들이 애청곡으로 꼽고 있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는 베트 미들러의 고전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을 장미 색을 지닌 채 오늘도 누군가의 플레이어에서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들려주고 있을 것이다.

베트 미들러 (Bette Midler) : 1945년 12월 1일 미국 뉴저지주 페이터슨 출생

갈래 : 팝 록(Pop/Rock),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 소프트 록(Soft Rock)
관련 웹 사이트 : http://www.starpulse.com/Music/Midler,_Bette/


2010년 8월 9일 월요일

Olivia Newton John - Physical

 

Olivia Newton John - Physical

'밥 딜런(Bob Dylan)'의 1970년 곡으로 '비틀즈(Beatle)'의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1970년 11월에 발표한 자신의 솔로 음반 'All Things Must Pass'에 수록하기도 하였던 곡 'If Not for You'를 음반의 타이틀 곡으로 한 데뷔 음반 'If Not for You'를 1971년 11월에 발표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음반의 타이틀 곡인 'If Not for You'를 싱글로 발매하여 영국 싱글 차트에서 7위 까지 진출시켰고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는 25위 까지 진출시키며 새로운 스타의 출현을 팬들에게 알리게 된다.

같은 해에 'If Not for You'의 후속 곡으로 'Banks of the Ohio'를 발표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이 곡 역시 영국 싱글 차트에서 6위 까지 진출시키며 데뷔 곡에 이어 연속해서 싱글을 히트시키게 된다. 'Banks of the Ohio'는 19세기에 만들어져 구전되어 오는 민요를 팝 형태로 편곡한 것으로 흔히 '머더 발라드(Murder Ballad)'라고 하는 갈래에 속하는 음악이며 살인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곡이다.

자신과 결혼할 의사가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오하이오의 강둑으로 불러내 칼로 찔러 죽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곡은 '쟈니 캐쉬(Johnny Cash)'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이 커버하여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가수 조영남이 '내 고향 충청도'라는 제목으로 개사하고 발표하여 히트시키기도 했던 곡이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Banks of the Ohio'를 히트시킨 후 1972년에 발표한 두번째 음반 'Olivia'에서는 별다른 히트 곡을 만들지 못하고 음반 활동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서면서 발표한 음반 'Let Me Be There'에서 또 다시 차트 진출 곡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싱글로 발매된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영국 싱글 차트와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에 진입하였던 것이다.

미국 가수 '존 덴버(John Denver)'의 1971년 곡을 커버한 'Take Me Home, Country Roads'는 영국과 미국의 싱글 차트에서 각각 15위와 119위 까지 진출하였고 뒤이은 싱글 'Let Me Be There'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6위를 기록하며 히트를 하게 된다. '빌보드 컨트리 싱글 차트(Billboard Hot Country Singles)'에서도 7위 까지 진출한 히트 곡 'Let Me Be There'로 인해 올리비아 뉴튼 존의 세번째 음반 'Let Me Be There'는 컨트리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후 올리비아 뉴튼 존은 컨트리 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사랑받으며 'I Honestly Love You', 'Have You Never Been Mellow', 'Please Mr. Please'등을 히트시키다 1978년에 이르러 변신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1978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그리스(Grease)'였다. 뮤지컬 영화 그리스에서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와 주연으로 출연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사운드 트랙 음반에도 참가하여 존 트라볼타와 함께 'You're the One That I Want'를 불렀는데 팝 취향의 이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영화 그리스 출연 이후 팝 가수로 완전히 변신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1980년에 그리스와 비슷한 형식의 영화 '제나두(Xanadu)'에 다시 출연하였고 사운드 트랙 음반에도 참가하여 록 그룹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ectric Light Orchestra)'와 함께 한 영화의 주제 곡 'Xanadu'와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와 함께 부른 'Suddenly' 그리고 자신의 솔로 곡 'Magic'을 사운드 트랙 음반에 수록하였다.

이 세곡은 모두 싱글로 발매되어 'Magic'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Xanadu'와 'Suddenly'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각각 8위와 20위를 기록하였다. 1981년 10월에 올리비아 뉴튼 존은 새 음반 'Physical'을 세상에 공개하게 되는데 음반의 타이틀 곡인 'Physical'이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무려 10주간 1위 자리를 지키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몸에 꽉 끼는 '레오타드(Leotard)' 복장으로 '헬스로빅(Heathrobic)' 장면을 연출한 'Physical'의 뮤직 비디오는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 모았고 개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MTV'에서는 연일 'Physical'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하기도 하였다. 'Physical'의 엄청난 히트와 뮤직 비디오의 성공은 에어로빅 비디오 제작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여 대중화로 바로 이어졌으며 많은 배우들이 에어로빅 비디오 제작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올리비아 뉴튼 존 (Olivia Newton John) : 1948년 9월 26일 영국 케임브리지 출생

갈래 : 컨트리 팝(Country-Pop), 팝 록(Pop/Rock), 소프트 록(Soft Rock)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olivianewton-john.com/

 


2010년 8월 7일 토요일

Olivia Newton John - If Not For You

 

Olivia Newton John - If Not For You

영국에서 태어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성장한 가수이자 배우인 올리비아 뉴튼 존은 웨일스(Wales) 출신으로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 '브린리 뉴튼 존(Brinley Newton-John)'과 독일인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학자인 '막스 본(Max Born)'의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 '이리네 본(Irene Born)' 사이에서 태어났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다섯살때 그녀의 아버지가 호주의 멜버른 국립대학(University of Melbourne) 오몬드 칼리지(Ormond College)에 학장으로 부임하게 되자 일가족 모두는 호주로 건너가게 되었고 올리비아 뉴튼 존은 호주에서 성장하게 된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열다섯살때 학교 친구들과 함께 생애 처음으로 여성 보컬 그룹 '솔 포(Sol Four)'를 결성하여 형부가 운영하는 커피 숍의 무대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하였다. 짧은 활동 기간을 끝으로 솔 포를 해산한 올리비아 뉴튼 존은 잠시지만 호주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이 당시 올리비아 뉴튼 존은 함께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만난 '팻 캐롤(Pat Carroll)'과 함께 듀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듀오의 활동 기간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팻 캐롤과 헤어진 올리비아 뉴튼 존은 텔레비전의 장기 자랑 쇼 프로그램인 'Sing, Sing, Sing'에 출연하여 우승하면서 부상으로 영국 런던행 여행 상품을 받기도 하였는데 런던으로 여행을 다녀온 1963년 부터는 호주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게 된다. 주간에 방영되는 쇼 프로그램과 주말에 방영되는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조금씩 인기를 얻어 가던 올리비아 뉴튼 존은 1966년에 영국의 '데카 음반사(Decca Records)'와 계약하고 싱글 'Till You Say You’ll Be Mine'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정식 데뷔하였다.

1970년에는 청소년 팝 밴드의 이야기를 그린 영국 영화 '투모로우(Toomorrow: Tomorrow가 아님)'에 출연하였고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도 참가하였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밴드인 투모로우의 멤버로는 올리비아 뉴튼 존(보컬), 벤 토마스(Ben Thomas, 기타), 칼 챔버스(Karl Chambers, 드럼), 빅 쿠퍼(Vic Cooper, 오르간)가 출연하고 있으며 멤버가 그대로 사운드 트랙 음반에 참여하였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영화 출연 후 데뷔 음반을 발표하게 되는데 1971년 11월에 발표된 그녀의 데뷔 음반은 'If Not for You'였다. 싱글로 발매된 음반의 타이틀 곡인 'If Not for You'는 '밥 딜런(Bob Dylan)'의 1970년 곡을 커버한 것으로 영국의 싱글 차트에서 7위 까지 진출하였고 호주의 싱글 차트에서도 7위를 기록하였다. 캐나다와 뉴질랜드, 아일랜드의 싱글 차트에서도 탑 텐에 진입한 'If Not for You'는 미국에서도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에서 25위 까지 진출하며 대형 신인 가수의 탄생을 알렸다.

우리나라에서도 'If Not for You'는 올리비아 뉴튼 존의 초기를 대표하는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한때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If Not For You'를 소재로 하여 가사를 흘려 듣게 되면 '기분 나쁘유'로 들린다는 우스개 소리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올리비아 뉴튼 존 (Olivia Newton John) : 1948년 9월 26일 영국 케임브리지 출생

갈래 : 컨트리 팝(Country-Pop), 팝 록(Pop/Rock), 소프트 록(Soft Rock)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olivianewton-john.com/

2010년 8월 3일 화요일

Bob Welch - Ebony Eyes

 

Bob Welch - Ebony Eyes

작곡가 겸 가수이며 기타 연주자이기도 한 '밥 웰치'는 미국의 캘리포니아(California)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태어났다. 밥 웰치의 부모는 연예계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인 '로버트 웰치(Robert Welch)'는 '파라마운트 영화사(Paramount Pictures)'의 영화 제작자로 1940년대와 1950년대 걸쳐서 여러편의 히트 영화를 제작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인 '템플턴 웰치(Templeton Welch)'는 1941년에 개봉된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의 각본을 직접 쓰고 감독과 연기를 한꺼번에 했던 '오슨 헬즈(Orson Welles)'가 뉴욕에서 운영하고 있던 '머큐리 극장(Mercury Theatre)'에서 가수 겸 배우로 출연하고 있던 연예인이었다. 어린 시절에 클라리넷(Clarinet)을 배우며 음악에 대한 이해도를 키워 나간 밥 웰치는 10대에 접어들면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며 록과 재즈, 리듬 앤 블루스 같은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동시에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된다.

이런 그의 꿈을 향한 도전은 1964년에 '세븐 소울스(Seven Souls)'라는 밴드에 가입함으로써 출발하게 된다. 하지만 밥 웰치는 파리 유학을 위해 1969년 까지 이어진 밴드 활동을 접어야 했고 1960년대 말에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Sorbonne) 대학으로 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파리의 유학 생활 중에서도 밥 웰치는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 행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새로운 음악 활동을 위한 기회를 기다리던 1971년 여름, 밥 웰치에게 음악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그것은 록 밴드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이 새로운 기타 주자를 공개 모집한다는 작은 광고였다. 당시 록 밴드 플리트우드 맥은 '피터 그린(Peter Green)'에 이어 '제레미 스펜서(Jeremy Spencer)' 마저 밴드를 떠나 버리자 새로운 기타 주자를 공개 모집을 통해 뽑는다는 광고를 내게 된다.

이 광고를 보고 공개 모집 경연에 참가한 밥 웰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플리트우드 맥의 멤버로 확정되면서 새로운 음악 인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플리트우드 맥의 일원으로 합류한 밥 웰치는 1972년에 발표한 음반 'Bare Trees'를 시작으로 1973년 음반 'Mystery to Me'와 1974년에 발표한 음반 'Heroes Are Hard to Find'까지 3년간 활동하다 밴드를 탈퇴하고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플리트우드 맥을 탈퇴한 밥 웰치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쓰로 툴(JethroTull)'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던 '글렌 코닉(Glenn Cornick)'과 사이키델릭 록 밴드 '나즈(Nazz)' 출신의 드러머 '톰 무니(Thom Mooney)'와 함께 1975년에 파워 트리오 '파리스(Paris)'를 결성하였다. 파리스는 데뷔 음반인 'Paris'와 1976년 음반 'Big Towne, 2061'까지 두장의 음반을 발표하고 1977년에 해산하였고 밥 웰치는 이때 부터 솔로로 활동하게 된다.

1977년 9월에 밥 웰치는 자신의 솔로 데뷔 음반 'French Kiss'를 플리트우드 맥 시절의 동료인 드러머 믹 플리트우드(Mick Fleetwood)와 크리스틴 맥비(Christine McVie, 백보컬)의 도움을 받아 발표하였다. 또한 이 음반엔 밥 웰치의 후임으로 플리트우드 맥에 가입한 '린지 버킹햄(Lindsey Buckingham)'이 기타를 연주해 주고 있기도 한데 이 음반에서 싱글로 발표된 'Ebony Eyes'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4위 까지 오르며 히트를 하게 된다.

'Ebony Eyes'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었던 곡으로 특히 가수 혜은이가 1979년에 발표한 '제3 한강교' 음반에 '검은 눈동자'라는 제목의 번안 곡으로 수록하여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밥 웰치 (Bob Welch) : 1945년 8월 3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생

갈래 : 소프트 록(Soft Rock), 팝 록(Pop/ Rock)
관련 웹 사이트 : http://www.bobwelch.com/

 

2010년 7월 9일 금요일

Mocedades - Eres Tu

Mocedades - Eres Tu

 

스페인 바스크 지방(Basque Country)의 대도시 빌보아(Bilbao)에서 1967년에 결성된 보컬 그룹 모세다디스의 역사는 우랑가 집안의 남매들과 블란코 집안의 형제들이 같은 대학에서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중반 부터 '우랑가 시스터즈(The Uranga sisters)'라는 이름의 보컬 밴드 활동을 하던 세자매 아마야, 이사스꾼, 에스띠발리스(Estibaliz)는 큰언니인 아마야가 같은 대학에서 만난 라파엘과 세르지오(Sergio)라는 이름을 가진 블란코 형제와 자주 만나 서로간의 음악적 의견을 나누며 음악 활동을 하다가 함께 보컬 밴드를 결성해보자는데 의견을 모으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집안의 젊은이들을 주죽으로 하여 8인조의 팝 보컬 밴드 '보이시스 앤 기타스(Voices and Guitars)'가 1967년에 출범하게 된다. 아마야 우랑가는 남동생인 로베르또 우랑가를 밴드에 합류 시켰고 블란코 형제와 의견을 조율하여 '프란시스코 빠네라(Francisco Panera)'와 '호세 이피나'를 가입시키면서 8인조라는 대형 보컬 밴드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형 8인조 보컬 밴드인 보이시스 앤 기타스는 '에스띠발리스 우랑가(Estibaliz Uranga)'와 '세르지오 블란코(Sergio Blanco)'가 듀오로써 주 보컬을 담당하였으며 나머지 멤버들이 보조 보컬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음악은 '비틀즈(The Beatles)'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포크 팝 음악을 추구하였다. 1969년에 보이시스 앤 기타스는 밴드 이름을 모세다시스로 바꾸고 스페인의 '자피로 음반사(Zafiro Records)'를 통해 데뷔 음반 'Mocedades 1'을 발표하였다.

 

1970년에 두번째 음반 'Mocedades 2'를 스페인과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에서 발표하고 나서 모세다디스는 호세 이피나와 프란시스코 빠네라가 탈퇴하게 되어 첫번째 멤버 교체를 하면서 멤버의 수가 처음으로 줄어들게 된다. 보이시스 앤 기타스 결성 당시 군 복무 문제로 밴드에 합류하지 못했던 '사비에르 가라이'가 탈퇴한 프란시스코 빠네라 대신 모세다디스에 합류하였고 호세 이피나의 자리는 그대로 비워두었던 것이다.

1971년 7인조로 세번째 음반 'Mocedades 3'를 발표한 모세다디스는 밴드를 떠났던 호세 이피나가 돌아온 대신에 에스띠발리스 우랑가와 세르지오 블란코가 듀오로 활동하기 위해 모세다디스를 탈퇴하면서 이때 부터 6인조로 활동하게 된다. 1972년 한해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 준비로 보낸 모세다디스는 1973년에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Eres Tu(Touch The Wind)'로 참가하여 2위로 입상하게 된다.

이 곡은 곧바로 미국에서 싱글로 발표되었고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에서 9위 까지 진출하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는데 스페인어로 불린 노래가 빌보드 싱글 차트 탑텐에 들어간 것은 빌보드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미국에서의 히트를 시작으로 'Eres Tu'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또한 모세다디스는 1973년에 히트 곡 'Eres Tu'가 수록된 네번째 음반 'Mocedades 4'를 미국과 스페인에서 동시에 발표하였다.

모세다디스가 미국 시장에서 싱글이 아닌 정규 음반을 발표하기는 처음이었는데 이전에 발표했던 석장의 음반은 스페인과 푸에르토리코에서만 발매되었으나 'Eres Tu'의 히트로 인해 미국 시장에도 진출하게 된 것이다. 한편 모세다디스의 데뷔 음반 부터 네번째 음반 까지는 음반의 제목에 별다른 표기가 없이 'Mocedades'로 똑같이 되어 있고 다섯번째 음반에서 부터 'Mocedades 5'로 표시 되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네번째 음반 까지는 편의상 숫자를 붙여 제목을 분류하고 있다.

모세다디스 (Mocedades) :
아마야 우랑가 (Amaya Uranga, 보컬) : 1947년 2월 18일 스페인 빌바오 출생
이사스꾼 우랑가(Izaskun Uranga, 보컬) : 1950년 4월 17일 스페인 빌바오 출생
로베르또 우랑가 (Roberto Uranga, 보컬) :
라파엘 블란코 (Rafael Blanco, 기타) :  
호세 이피나 (Jose Ipina) :
사비에르 가라이 (Javier Garay) :

갈래 : 팝 록(Pop/Rock), 라틴 팝(Latin Pop), 소프트 록(Soft Rock)
관련 웹 사이트 : http://mocedades.com/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Skylark - Wildflower

Skylark - Wildflower

 

이력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캐나다 밴드 '스카이락'은 1971년에 결성되어 미국의 '북서 태평양 연안(Pacific Northwest)'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던 밴드였다. 밴드의 리더이자 키보드 주자인 데이비드 포스터를 주축으로 하여 1971년에 스튜디오 세션맨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스카이락은 1972년에 로커빌리 가수 '로니 호킨스(Ronnie Hawkins)'의 백업 밴드로 '캐피털 음반사(Capitol Records)'와 계약하면서 음반 녹음의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

 

스카이락은 데이비드 포스터의 친구로 '브리티시컬럼비아(British Columbia)'주 '빅토리아(Victoria)' 시의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데이브 리처드슨(Dave Richardson)'이 습작으로 쓴 시를 가사로 하여 밴드의 기타 주자 '덕 에드워즈가 노래로 만든 'Wildflower'를 데모 테이프로 제작하여 몇군데의 음반사로 보내 음반 계약 의사를 타진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반사에서 스카이락의 노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음반 계약의 꿈이 사라지는 듯 하였으나 몇군데의 음반사를 거치며 거절 당하던 데모 테이프가 캐피털로 보내져 가수 겸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이기도 한 '베리 드 보존(Barry De Vorzon)'에게 전달되면서 기회를 잡게 된다. 베리 드 보존은 스카이락의 데모 테이프를 듣는 순간 히트를 예감하고 캐피털에 스카이락과의 음반 계약을 적극 권유하였고 마침내 스카이락은 로니 호킨스의 백밴드 활동 포함이라는 조건이 붙게 되지만 캐피털에 입성하여 데뷔 음반의 녹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스카이락은 어렵게 녹음한 데뷔 음반 'Skylark'을 1972년에 공개하였다. 하지만 밴드의 데뷔 음반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로 접어들게 되며 실패로 끝나는 듯 보였다. 전환의 기회가 찾아 오게 된 것은 캐나다의 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음반에서 발췌한 'Wildflower'가 전파를 타면서 부터 였다. 온타리오주의 AM 라디오 방송국인 'CKLW '의 음악 감독인 '로잘리 트롬블리(Rosalie Trombley)'의 탁월한 감각 덕에 방송을 타게 된 'Wildflower'는 이후 캐나다 전역으로 퍼지며 히트를 하였고 차트에도 진입하게 된다.

 

캐나다의 '어덜트 컨템퍼러리(Adult Contemporary)' 차트에 진입한 'Wildflower'는 빠른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차트의 정상에 올라섰고 음반 판매량도 100만장을 넘어서게 되어 무명이던 스카이락을 캐나다의 인기 그룹으로 만들어 주었다. 캐나다에서의 인기를 기반으로 하여 미국 진출에 성공한 스카이락은 싱글 'Wildflower'를 미국에서 발매하여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에 진입시켰고 싱글 차트 9위 까지 진출시키는 히트를 하게 된다.

 

싱글 'Wildflower'의 성공은 후속 음반에 대한 기대를 한껏 모으게 했지만 1974년에 발표된 두번째 음반은 실패로 마감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아 밴드도 해산하게 된다. 'Wildflower' 이후 미국의 차트에서 다시는 스카이락의 음악을 찾을 수 없었지만 'Wildflower'의 성공은 데이비드 포스터에게 날개를 달아주어 음악적 재능을 화려하게 꽃피우게 하였다.

스카이락의 해체 이후 데이비드 포스터는 글로리아 에스테판(Gloria Estefan), 닐 다이아몬드(Neil Diamond),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브라이언 아담스(Bryan Adams), 셀린 디온(Celine Dion), 시카고(Chicago),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and Fire), 프린스(Prince), 휘트니 휴스톤(Whitney Houston)등 수많은 가수들과 함께 작업하여 히트 곡을 만들어내는 등의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스카이락 (Skylark) :
데이비드 포스터 (David Foster, 키보드) : 1949년 11월 1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출생
도니 제라드 (Donny Gerrard, 리드보컬) :
비제이 쿡 (B.J. Cook, 백보컬) :
덕 에드워즈 (Doug Edwards, 기타) :
스티븐 퍽슬리 (Steven Pugsley, 베이스) :
칼 그레이브스 (Carl Graves, 퍼커션) :
두리스 맥스웰 (Duris Maxwell, 드럼) : 1946년 6월 15일 캐나다 온타리오(Ontario) 출생

갈래 : 소프트 록(Soft Rock), 팝 록(Pop/Rock),
관련 웹 사이트 : http://pnwbands.com/skylark.html

 

 

2010년 5월 21일 금요일

Three Dog Night - One

Three Dog Night - One

쓰리 독 나이트 (Three Dog Night) :
대니 허튼 (Danny Hutton, 보컬) : 1942년 9월 10일 아일랜드 번크레나(Buncrana) 출생
척 네그론 (Chuck Negron, 보컬) : 1942년 6월 8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출생
코리 웰스 (Cory Wells, 보컬) : 1942년 2월 5일 미국 뉴욕주 버펄로(Buffalo) 출생
마이크 올섭 (Mike Allsup, 기타) : 1947년 3월 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크데일 출생
조 셔미 (Joe Schermie, 베이스) : 1946년 2월 12일 미국 출생, 2002년 3월 25일 사망
지미 그린스푼 (Jimmy Greenspoon, 키보드) : 1948년 2월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생
플로이드 스니드 (Floyd Sneed, 드럼) : 1942년 11월 22일 캐나다 앨버타주 캘거리 출생

갈래 : 팝 록(Pop/Rock), 소프트 록(Soft Rock), AM 팝(AM Pop)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threedognight.com/

 

스물한 곡의 싱글을 연속해서 히트시켰고 그 가운데 열한 곡을 빌보드 싱글 차트 탑 텐에 진입시킨 히트 곡 제조기 '쓰리 독 나이트'는 밴드의 리더인 대니 허튼이 '세명의 보컬리스트가 있는 밴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기발한 착상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1964년 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대니 허튼은 1965년에 '헤나 바베라 음반사((Hanna?Barbera Records)'와 계약하고 1966년 까지 헤나 바베라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67년의 어느날 코리 웰스는 평소 알고 지내던 대니 허튼에게 세명의 보컬리스트가 있는 밴드를 만들어 보자는 의견을 전해 듣고 함께 생각을 구체화 시켜나가게 된다. 십대 시절 부터 뉴욕주의 버펄로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밴드에 가입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한 코리 웰스는 당시 '코리 웰스 블루스 밴드(Cory Wells Blues Band)'를 막 출범 시키고 활동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코리 웰스는 대니 허튼의 생각을 친구인 척 네그론에게 전하여 합류 시키면서 점차 새로운 밴드의 밑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세사람은 자신들의 보컬을 받쳐 줄 연주자들을 찾아 나서게 되는데, 가장 먼저 발탁된 인물이 코리 웰스 블루스 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던 '조 셔미'였다.

조 셔미 다음으로 합류한 인물이 십대 시절 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하여 고등학교의 댄스 밴드를 거치며 밴드 경력을 쌓았고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밴드를 거친 '마이크 올섭'이었다. 캐나다의 배우 겸 코미디언이자 가수이기도한 '토미 총(Tommy Chong)'의 밴드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한 '플로이드 스니드'는 1966년에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고 캘리포니아로 와서 활동하던 중 대니 허튼을 비롯한 세명의 보컬리스트를 만나면서 밴드의 드러머로 합류하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여러 밴드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지미 그린스푼은 가장 늦은 1968년에 세명의 보컬리스트를 만나 그들의 밴드에 합류하면서 밴드의 기본 구성이 완성되었다. 밴드의 모든 구성원이 갖춰진 가운데 밴드 이름을 두고 고심하던 멤버들에게 대니 허튼의 여자 친구인 '준 페어차일드(June Fairchild)'가 호주 원주민 관련 잡지에서 읽었던 쓰리 독 나이트에 관한 글을 멤버들에게 들려주면서 쓰리 독 나이트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사용해 볼 것을 제안하게 된다.

호주 원주민 관련 잡지에 실려 있었던 쓰리 독 나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오래전 호주의 원주민들은 야생 개인 '딩고(Dingo)'를 훈련시켜 함께 사냥을 다니다 날이 저물면 구덩이를 파고 개와 함께 잠을 청했는데, 보통 추위를이겨내기 위해 두마리의 개를 껴안고 잠들고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마리의 개로도 추위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추운 밤이 되면 원주민들은 세마리의 개를 껴안고 자면서 추위를 녹였다고 한다. 즉 쓰리 독 나이트란 아주 추운 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준 페어차일드의 제안을 받아 들인 멤버들은 밴드의 이름을 쓰리 독 나이트로 정하고 클럽 출연을 시작으로 공식 활동을 시작하였다. 클럽 활동을 통해 지명도를 넓혀 나가던 쓰리 독 나이트는 어렵지 않게 'ABC 음반사(ABC-Dunhill Records)'와 음반 계약을 체결하고 스튜디오로 들어가 데뷔 음반을 녹음하게 된다. 1969년 1월 데뷔 음반 'Three Dog Night'를 발표한 밴드는 싱글 'One'을 히트시키며 순식간에 인기 밴드로 급부상하게 된다.

미국 가수 '해리 닐슨(Harry Nilsson)'이 1968년에 발표하였던 곡을 커버한 'One'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5위 까지 가파르게 상승하였으며 싱글의 히트에 힘입어 데뷔 음반도 앨범 차트에서 11위 까지 진출하며 성공적인 데뷔를 장식하였다. 데뷔 음반의 성공 이후 쓰리 독 나이트는 'Mama Told Me Not to Come', 'Joy to the World', 'Black and White' 같은 곡들을 히트시키며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 들이는 슈퍼 밴드가 되었다.

쓰리 독 나이트의 히트 곡은 대부분 다른 가수들의 곡을 커버한 곡이지만 귀에 익은 멜로디를 밴드 고유의 색채로 재해석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밴드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곡들이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