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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6일 목요일

Paper Lace - Love Song

 

Paper Lace - Love Song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던 히트 곡 'The Night Chicago Died'의 주인공인 영국 팝 밴드 '페이퍼 레이스'는 1969년에 노팅엄(Nottingham)을 근거지로 하여 드러머인 '필립 라이트'를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이다. 1960년 중반 대부분의 영국 선술집(Pub) 한쪽 구석에는 연주자들을 위한 피아노가 놓여져 있었다. 이러한 음악적 환경은 가수를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선술집 주인과 잠깐의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별다른 장비가 없어도 누구나 쉽게 피아노 반주와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 라이트도 이런 선술집의 무대를 전전하는 유랑 가수 생활을 5년 정도 하다가 노팅엄에 정착을 하여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려가게 된다. 매일 밤 선술집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필립 라이트는 노팅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인들을 주축으로 밴드 결성의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러한 결심의 배경에는 필립 라이트가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뮤직 박스(Music Box)'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 라이트는 팝 음악 취향의 밴드를 구상하고 노팅엄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 중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음악인들을 찾게 된다.

필립 라이트는 자신이 구상한 밴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여러 명의 멤버를 받아들이고 내보며 밴드의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고 1969년에 이르러 데이브 맨더스, 마이클 본, 조나단 애런트를 구성원으로 하는 4인 체제의 기본 밴드 구성을 마무리 하게 된다. 네명의 젊은이들은 밴드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고심하다 최종적으로 페이퍼 레이스라는 이름을 만들어 밴드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페이퍼 레이스라는 이름은 노팅엄에서 고품질의 종이를 생산하고 있던 공장의 이름인 레이스에서 착안을 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페이퍼 레이스는 '폴리돌 음반사(Polydor Records)'와 두장의 싱글과 한장의 정규 음반을 발매하기로 계약을 하고 데뷔 싱글을 준비하게 된다. 1971년에 페이퍼 레이스는 의욕에 찬 데뷔 싱글 'You Can't Touch Me'와 두번째 싱글 'In The Morning'을 연이어 발표하였지만 이 싱글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72년 3월에 발표한 데뷔 음반인 'First Edition'도 싱글들의 실패와 맞물리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음반 판매 실적도 저조하였다. 결국 페이퍼 레이스는 조용히 음반 활동을 마무리 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다.

페이퍼 레이스는 단시간에 밴드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찾다가 때마침 영국 'ITV'에서 방영하고 있던 연예인 선발 대회 성격의 프로그램인 '오퍼튜니티 녹스(Opportunity Knocks)'에서 출연자를 모집하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고 멤버들은 이 쇼에 도전해보기로 의견을 모으게 된다. 페이퍼 레이스는 많은 지원자들을 물리치고 쇼에 출연할 자격을 얻게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이 쇼에서 우승까지 차지하게 된다.

오퍼튜니티 녹스에서의 우승을 계기로 페이퍼 레이스는 '필립스 음반사(Philips Records)'와 음반 계약을 하고 두번째 음반의 발매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1974년에 싱글 'Billy Don't Be A Hero'의 발표를 시작으로 데뷔 음반의 부진을 완전히 떨쳐버리게 된다. 반전(Anti-War) 곡인 'Billy Don't Be A Hero'는 1974년 3월 16일에 영국의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히트를 하였고 미국 팝 밴드인 '보 도널슨 앤 더 헤이우즈(Bo Donaldson and The Heywoods)'가 미국에서 발표하여 1974년 6월 15일에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대형 히트를 하여 페이퍼 레이스가 미국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페이퍼 레이스는 영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두번째 음반 'And Other Bits Of Material'을 1974년 6월에 발표하였고 두번째 싱글인 'The Night Chicago Died'를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게 된다. 영국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거둔 'The Night Chicago Died'는 1974년 8월 17일자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 미국에서 자신들의 노래가 성공을 거두게 되자 페이퍼 레이스는 미국 시장 데뷔 음반인 'Paper Lace'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 음반은 영국에서 발표된 음반 'And Other Bits Of Material'에 수록되었던 'Bye Bye Blues'를 삭제하는 대신 'The Black Eyed Boys'를 삽입하고 수록 곡 순서도 약간 바꾼 상태로 발표되었다.

물론 히트 곡들인 'The Night Chicago Died'와 'Billy Don't Be A Hero'를 첫번째와 두번째 트랙에 배치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십대들을 겨냥한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 '슈퍼주니어 K.R.Y'가 번안하여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삽입하기도 했던 곡인 'The Night Chicago Died'외에도 페이퍼 레이스의 두번째 음반 'And Other Bits Of Material'에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애절한 사랑 노래인 'Love Song'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한소리 레코드에서는 그동안 구경조차 힘들었던 많은 음반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페이퍼 레이스의 음반도 포함되어 있었다. 페이퍼 레이스의 'Love Song'이 우리나라의 팝팬들을 사로잡아 버리자 한소리 레코드에서도 페이퍼 레이스의 음반을 발표하게 되었던 것인데 영국에서 발매된 음반이나 미국에서 발매된 음반과는 다르게 한소리 레코드에서 발매된 페이퍼 레이스의 음반에는 'Love Song'이 첫번째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고 수록 곡들의 순서도 다르게 발매되었다.

베이지 색의 바탕을 배경으로 상단에 붉은 글씨로 Paper Lace 라고 적혀있는 이 음반은 해적판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빽판으로 불리던 푸르딩딩한 표지에 들어있던 해적판과는 다르게 상당히 좋은 음질로 발매되어 음악 애호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었다. 한소리 레코드에서 발매된 음반들을 살펴보면 심의번호가 음반 표지에 인쇄되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법으로 유통된 해적판이 아닌가 하는 의견들을 대체적으로 내놓고 있기도 하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해적판하면 대표적으로 떠올렸던 레이블인 한소리 레코드와 신라 레코드는 음악에 목마른 음악 애호가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던 단비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노팅엄에서 결성된 밴드답게 페이퍼 레이스는 우리나라 팝팬들의 애청곡인 'Love Song'에도 노팅엄을 가사에 포함시켜 지역 사랑을 과시하고 있다.

페이퍼 레이스 (Paper Lace) :
데이브 맨더스 (Dave Manders, 기타, 보컬) : 1947년 8월 4일 영국 노팅엄 출생
마이클 본 (Michael Vaughn, 기타) : 1950년 7월 27일 영국 셰필드 출생
조나단 애런트 (Jonathan Arendt, 베이스) : 1949년 8월 13일 일본 도쿄 출생
필립 라이트 (Philip Wright, 드럼) : 1946년 4월 9일  영국 노팅엄 출생

갈래 : 버블검(Bubblegum), AM 팝(AM Pop), 팝 록(Pop/Rock)
공식 웹 사이트 : 없음
관련 동영상 감상하기 : http://youtu.be/opEWrrPxkvQ

2010년 5월 7일 금요일

Shocking Blue - Venus

Shocking Blue - Venus

쇼킹 블루 (Shocking Blue) :
마리스카 베레스 (Mariska Veres, 보컬) : 1947년 10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 출생, 2006년 12월 2일 사망
로비 반 리우벤 (Robbie van Leeuwen, 기타, 시타르, 보컬) : 1944년 10월 29일 네덜란드 출생
클라예 반 데르 발 (Klaasje van der Wal, 베이스) : 네덜란드 출생
코르 반 데르 빅 (Cor van der Beek, 드럼) : 네덜란드 출생

갈래 : 팝 록(Pop/Rock), 버블검(Bubblegum), AM 팝(AM Pop)
관련 웹 사이트 : http://www.geocities.com/ofmang/greg/shockblu.html

 

'n분의 1', 혹은 '지 팔뚝 지가 흔들기' 등으로 사용되는 말의 어원으로 콩글리시이기도 한 '더치 페이(Dutch Treat)'라는 말이 만들어진 배경의 나라인 네덜란드 출신 록 그룹 쇼킹 블루는 1967년에 네덜란드의 행정 수도인 '헤이그(The Hague)'에서 결성되었다. 그룹의 리더인 로비 반 리우벤은 1964년에 결성되어 네덜란드에 불어닥친 '비트 음악(Beat Music)'의 열풍을 주도했던 그룹인 '모션스(The Motions)'에서 활동했던 기타 주자로써 1967년에 모션스를 탈퇴하고 쇼킹 블루를 결성하여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모션스에서 탈퇴한 로비 반 리우벤은 1967년에 새로운 그룹 결성을 위한 멤버 모집에 나서 클라예 반 데르 발과 코르 반 데르 빅, 그리고 프레드 데 빌데(Fred de Wilde, 보컬)를 구성원으로 하는 4인조 밴드인 쇼킹 블루를 출범시켰다. 쇼킹 블루는 결성 첫해인 1967년에 '폴리돌 음반사(Polydor Records)'를 통해서 싱글 'Love Is In The Air'를 발표하면서 데뷔하였고, 1968년 봄에는 데뷔 음반 'Beat With Us'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발매한 데뷔 싱글과 데뷔 음반은 차트에 진입하지 못한채 실패로 돌아갔고 쇼킹 블루는 새로운 음반사를 찾아야 했다. 네덜란드의 유명 음반사인 '듀레코 음반사(Dureco Records)'는 음반사를 찾고 있던 쇼킹 블루와 음반 계약을 맺고 산하의 레이블인 '핑크 엘리펀트(Pink Elephant)'를 통해 싱글 'Lucy Brown Is Back In Town'을 발표하게 하였다.

싱글로 발매된 'Lucy Brown Is Back In Town'은 네덜란드 싱글 차트에서 21위 까지 오르며 쇼킹 블루의 첫 Top 40 진출 곡이 되었다. 음반사를 옮기고 첫번째로 발표한 싱글이 소폭의 히트를 거두고 있을 무렵 밴드의 보컬을 담당하고 있던 프레드 데 빌데가 밴드를 탈퇴하는 일이 발생하자 쇼킹 블루는 새로운 보컬리스트를 찾아야 했다.

이즈음 네덜란드의 싱글 차트에서 'Dong Dong Di Ki Di Gi Dong'이라는 곡으로 1위를 차지하며 맹위를 떨치고 있던 록 그룹 '골든 이어링(Golden Earring)'의 차트 정복 기념 파티에 참가한 밴드인 '범블 비(Bumble Bees)'에서 보컬을 담당하고 있던 마리스카 베레스의 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쇼킹 블루 매니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매니저는 그녀에게 쇼킹 블루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프레드 데 빌데 대신 쇼킹 블루의 보컬리스트로 가입하게 된 마리스카 베레스는 1968년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싱글 'Send Me A Postcard'를 발표하여 차트에 올려 놓으면서 네덜란드의 팝계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하였다. 또한 'Send Me A Postcard'에 이어서 1969년에 발표한 싱글 'Long And Lonesome Road'도 차트에 진입시키면서 쇼킹 블루는 네덜란드의 인기 그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Long And Lonesome Road'의 히트를 이어가기 위해 쇼킹 블루는 새로운 싱글 'Venus'를 서둘러 발표하였는데 뜻밖에도 이 곡이 네덜란드를 넘어서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싱글 차트에서 3위에 오르며 히트를 한 'Venus'는 서서히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1970년에 유럽의 5개국인 벨기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였고 급기야 2월에는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히트 곡이 되었다.

 

 

2010년 4월 19일 월요일

Tommy Roe - Dizzy

 

Tommy Roe - Dizzy

토미 로 (Thomas David Roe) : 1942년 5월 9일 미국 조지아(Georgia)주 애틀랜타(Atlanta) 출생

 

분류 : 로큰롤(Rock & Roll), 선샤인 팝(Sunshine Pop), 버블검(Bubblegum), AM 팝(AM Pop)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tommyroe.com/


1962년에 발표한 싱글 'Sheila'를 같은 해 9월 1일자 '빌보드 싱글 차트(Billboard Hot 100)'에서 1위에 올려 놓으며 아이돌 스타로 급부상한 가수 토미 로는 어릴때 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열네살때 부터는 직접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토미 로는 '브라운 고교(Brown High School)' 재학 시절에 친구들인 '마이크 클라크(Mike Clark)', '바비 웨스트(Bobby West)'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고 '새틴스(The Satins)'라는 이름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하였다.

 

새틴스의 주 활동 무대는 고등학교의 댄스 파티장이나 조지아 대학교와 조지아 공대에서 자주 열리던 사교 클럽 파티 등이었다. 후일 토미 로의 음반 프로듀서로 함께 하게 되는 '펠튼 자비스(Felton Jarvis)'를 만나게 된 시점이 바로 이 당시였다. 1962년 2월, 토미 로와 펠튼 자비스는 새로운 매니저인 '빌 라우리(Bill Lowery)'와 함께 애틀랜타를 떠나 '내슈빌(Nashville)'로 가서 두 곡의 노래 'Save Your Kisses'와 'Sheila'를 녹음하고 공식 데뷔를 준비하게 된다.

 

두 곡의 노래 가운데 'Sheila'가 싱글로 세상에 공개되자 반응은 뜨거웠다. 이 곡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캐나다와 호주의 싱글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영국에서는 3위에, 독일에서는 9위에 오르며 히트를 하였고 토미 로는 10대들의 우상으로 집중 조명 받게 된다. 이후 토미 로는 발표 싱글들마다 히트를 하며 성공을 거두었으며 1963년에는 영국에서 장기 공연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아이돌 스타로 활동하던 토미 로는 196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인기의 기세가 줄어드는듯 하였으나 1969년에 싱글 'Dizzy'를 발표하면서 다시 한번 세간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1968년에 녹음하고 1969년에 발표된 싱글 'Dizzy'는 1969년 3월, 4주간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하였고 6월에는 영국의 싱글 차트에서 한주간 1위를 차지하였다.

 

영미 양국의 싱글 차트를 석권한 'Dizzy'는 캐나다의 싱글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며 호주의 싱글 차트에서는 2위에 그리고 독일과 노르웨이의 싱글 차트에서는 4위에 오르며 세계적인 히트 곡이 되었다. 펑크(Funk) 음악에서 갈라져 나온 고고(Go-go) 시대를 맞이한 1970년대 중후반 한국에서도 많은 고고장이 생겨났는데 통금 시간 이전 까지 고고장의 스피커를 울려대던 히트 곡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토미 로의 곡 'Dizzy'였었다.

 

고고장을 대표하는 히트 곡으로 많은 청춘 남녀들의 사랑을 받았던 'Dizzy'는 지금은 추억의 팝송으로 그리고 팝의 고전으로 애청되며 지난 날의 시간을 팝 팬들에게 떠올리게 해주는 매개체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