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5일 토요일

Eric Clapton - Wonderful Tonight

 

Eric Clapton - Wonderful Tonight

1966년 초, 런던 거리에는 '클랩튼은 신이다 (Clapton Is God)' 라는 낙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눈을 지그시 감은채 부드럽고 자연스런 손놀림으로 전기 기타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에 반한 팬들이 1963년 말 부터 Slowhand 라는 별명으로 그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 별명은 Clapton의 연주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한 예일 것이다. 유연하지만 강한 연주 방식에 팬들은 감탄할 수 밖에 없었고, Slowhand 로 불리우며 블루스 기타의 대명사로 떠오른 에릭 클랩튼(Eric Patrick Clapton)이 점점 그의 팬들에게 우상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 시기의 거리 낙서가 증명하고 있었다.

 

영국의 리플리(Ripley)에서 1945년 3월 30일 출생한 에릭 클랩튼은 조부모의 손에서 자라났다. 그의 출생 기록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데, 후일 에드워드 프라이어(Edward Fryer) 라는 캐나다 군인으로 알려졌으며 2차 대전이 끝난후 그의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로 에릭 클랩튼을 낳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후 에릭 클랩튼은 자신의 어머니를 누나로, 조부모를 부모로 알고 자라나게 된다. 에릭 클랩튼이 이 사실을 알게된 것은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 12세 무렵이었다고 하는데, 작고 왜소한 체격의 클랩튼은 이때부터 반항아적인 기질을 발휘했다고 한다. 출생의 비밀을 알고 민감해진 그는 또래들 중에서 따돌림 받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서로의 아픔을 다독거렸다.

 

이 즈음 버디 홀리(Buddy Holly)에게 열광하기 시작한 에릭 클랩튼에게는 버디 홀리의 레코드와 소외받던 아이들이 유일한 자신의 친구였던 셈이다. 에릭 클랩튼이 15세때 그의 삶을 완전히 뒤바꿀 어쿠스틱 기타 한대가 주어지는데, 우연히 선물받게 된 이 기타에 에릭 클랩튼은 곧 매료되어 틈만나면 기타 연주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동안 기타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그는 고교 졸업후 킹스턴 예술학교(Kingston College of Art)에 진학하게 되면서 다시 기타를 손에 잡게 된다. 학교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인을 공부하던 그는 아르바이트 삼아 클럽가에서 연주를 하고는 했는데, 디자인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에릭 클랩튼은 술과 음악에 빠져버렸고, 결국 그는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게 된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에릭 클랩튼은 런던으로 오게 되었고, 1963년 1월 런던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톰 맥기네스(Tom McGuinness) 라는 기타연주자를 만나 The Roosters라는 이름의 R&B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클랩튼은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R&B 그룹인 The Roosters는 그해 9월까지 계속 활동을 했으나 돈벌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베이스 주자를 구하지 못한채 어렵게 지속되던 그룹은 결국 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The Roosters 해산후 에릭 클랩튼은 톰 맥기네스, 케이시 존스(Casey Jones)와 함께 팝 취향의 그룹에서 잠시 활동하다 탈퇴한 후, 1963년 말 전설의 그룹 야드버즈(Yardbirds)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길을 걷게 된다. 에릭 클랩튼이 야드버즈에 가입하게 된 것은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인 토니 톱 토팜(Tony "Top" Topham)이 1963년 10월 그룹을 탈퇴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토니 톱 토팜의 후임을 찾던 야드버즈의 키스 렐프(Keith Relf)가 미소년인 에릭 클랩튼을 보고 그가 소녀 팬들에게 어필할 것이라는 생각에 가입을 권유하여 야드버즈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얼굴 마담격으로 선택되었다고 하지만 에릭 클랩튼은 야드버즈 멤버들의 연주 모습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야드버즈의 멤버들은 누구도 에릭 클랩튼 만큼의 연주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하여간 야드버즈에 가입한 에릭 클랩튼은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대신 출연하게 된 크로대디 클럽(Crawdaddy Club)에서 서서히 팬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Slowhand 라는 별명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야드버즈와의 활동 초기, 순회 공연차 영국에 온 블루스 하모니카 연주자 소니 보이 윌리엄슨[각주:1]과 협연할 기회가 생기는데 이때의 협연은 에릭 클랩튼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괴팍하기가 이를데 없었던 소니 보이 윌리엄슨은 연주에서 만큼은 분명 대가였고, 무대에서 잠시라도 실수를 하여 연주가 틀리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에릭 클랩튼은 항상 긴장해서 연주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기타 연주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한편 당시의 실황들은 1966년에 음반으로 발매가 되어 에릭 클랩튼의 뛰어난 연주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크로대디 클럽에서의 인기몰이는 그룹 야드버즈가 마퀴 클럽(Marquee Club)에 출연하는 발판이 되어 주었고, 신문 등에서도 야드버즈의 실황 내용이 자주 소개가 되었다. 또한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인 에릭 클랩튼은 그룹의 주역으로 급부상하게 되는데 1964년에 발매된 음반 'Five Live Yardbirds' 를 살펴보면 소극적이고 침울한 성격의 에릭 클랩튼이 어느정도 자신감을 회복한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그의 변화된 모습의 일면을 알수 있게 해준다. 특히 그가 보컬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트랙 Good Morning Little Schoolgirl 에서 에릭 클랩튼의 보컬과 연주는 그가 왜 야드버즈의 주역으로 부상했는지를 확실하게 알려주는 트랙이라고 할 것이다.

 

야드버즈와 함께 성공시대를 준비해 나가던 에릭 클랩튼은 1965년 3월 야드버즈를 탈퇴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다음 음반의 싱글 곡으로 발매 된 For Your Love 가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적 취향과 맞지 않아 멤버들과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싱글은 에릭 클랩튼의 탈퇴 후에 큰 히트를 기록하여 야드버즈에게 성공의 발판을 마련해주게 된다.

 

야드버즈 탈퇴 후 에릭 클랩튼은 존 메이올과 블루스브레이커스(John Mayall & the Bluesbreakers)를 거쳐 자신의 주도하에 그룹 크림(Cream)을 결성하여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후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 델라니 앤 보니 앤 프렌즈(Delaney & Bonnie & Friends), 데릭 앤 도미노스(Derek & The Dominoes)등을 거치며 활발한 음악 활동을 전개해 나가지만 그룹 데릭 앤 도미노스의 상업적 실패로 인한 침체기는 에릭 클랩튼에게 약물 중독이라는 시련을 안겨준다.

 

1974년 음반 461 Ocean Boulevard 로 재기에 성공한 에릭 클랩튼은 1977년에 Layla 이후 최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음반 Slowhand 를 발표하여 Cocaine, Lay Down Sally, 그리고 불후의 명곡 Wonderful Tonight 을 히트 시키게 된다. Wonderful Tonight 은 친구인 조지 해리슨(비틀스의 멤버)의 아내였으며 에릭 클랩튼이 사랑했던 패티 보이드를 위해 만든 곡이기도 하다.

 

각주 : 소니 보이 윌리엄슨(Sonny Boy Williamson)은 두명이 있었다.
John Lee Williamson 이라는 이름의 하모니카 명인이 첫번째로 이 사람은 1914년 3월 30일 테네시주에서 출생하여 1948년 6월 1일 일리노이주에서 강도에게 살해 당했다. 남겨진 음반은 별로 없지만 리틀 월터 제이콥스(Little Walter Jacobs) 나 쥬니어 웰스(Junior Wells) 같은 하모니카 연주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Sonny Boy Williamson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두번째 인물은 본명과 생년월일 등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라이스 밀러(Rice Miller, 본명인지 정확하지 않음)라는 인물로,  이 사람은 아칸사스주 헬레나에서 방송되던 인기 라디오 쇼 '킹 비스킷 타임'에서 노래와 블루스 하프를 연주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라디오쇼의 스폰서가 그에게 소니 보이 윌리엄슨인 척 해달라고 요구하자 밀러는 소니 보이 윌리엄슨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하게 되는데, 둘의 하모니카 연주 스타일이 전혀 달랐음에도 대중은 밀러를 진짜 소니 보이 윌리엄슨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글에 등장하는 Sonny Boy Williamson 은 바로 이 두번째 인물로 오리지널 Sonny Boy Williamson 가 살해되면서, 밀러는 유일한 Sonny Boy Williamson 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영국 투어와 함께 브리티쉬 인베이전의 주역들인 야드버즈, 애니멀스 등과 함께 협연을 하였고 라이브 앨범을 남겼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