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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3일 월요일

Nana Mouskouri - Over And Over

 

Nana Mouskouri - Over And Over

전세계적으로 약 3억장 정도의 음반 판매 기록을 갖고 있는 그리스 출신의 가수 '나나 무스꾸리(본명: Ioanna Mouschouri)'는 그리스의 크리티(Crete: 크레타)섬에 있는 하니아(Chania) 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콘스탄틴(Constantine)'은 하비아 지역의 한 극장에서 영사 기사로 일을 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어머니인 '엘리스(Alice)'는 같은 극장의 안내원으로 일을 하다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다. 나나 무스꾸리가 세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인 콘스탄틴은 가족을 이끌고 아테네(Athens)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이 결정은 자신의 아이들이 좀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어릴때 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자신의 큰 딸인 '제니(Jenny)'와 나나 무스꾸리를 음악 학교에 보내 교육 시키기로 결정하였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좀더 재능이 좋은 아이만을 음악 학교에 보내기로 하고 가정 교사에게 자문을 구하게 된다. 당시 나나 무스꾸리 보다는 그녀의 언니인 제니가 좀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여섯살때 부터 노래를 부르는데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열두살때 부터 가정 교사에게 노래 부르는 법을 배우고 있던 나나 무스꾸리의 표현력이 언니인 제니 보다 상대적으로 더 좋았기에 나나 무스꾸리가 가정 교사의 조언에 따라 음악 학교에 들어 가게 된다.

1950년에 '아테네 음악학교(Athens Conservatoire)'에 입학한 나나 무스꾸리는 오페라 발성법을 배우며 클래식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던 나나 무스꾸리는 학교에서 음악적 재능을 꽃 피우기 시작하였다. 음악 학교에 다닌지 8년째인 어느 날, 나나 무스꾸리는 그녀의 친구가 몸담고 있는 재즈 밴드가 출연하던 나이트 클럽에서 친구의 밴드와 함께 우연히 노래를 하게 되는데 이때 불렀던 노래가 어릴때 자주 들었던 재즈 가수 '엘라 핏츠제럴드(Ella Fitzgerald)'의 노래였었다.

클래식 교육을 받고 있는 오페라 가수 지망생이 재즈 음악을 불렀다는 사실이 당시로써는 쉽게 용납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나나 무스꾸리가 클럽에서 재즈를 노래했다는 사실은 담당 교수를 격분시켰고 결국 이 일로 인해 나나 무스꾸리는 학교를 떠날수 밖에 없었다. 무너진 오페라 가수의 꿈을 나나 무스꾸리는 재즈 음악으로 대신 채워 나가게 되는데 어릴때 즐겨 들었던 '엘라 핏츠제럴드',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의 음악들이 그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게 된다.

1957년,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떠난 나나 무스꾸리는 아테네의 '자키(Zaki)'라는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가 부르는 곡은 대부분 엘라 핏츠제럴드의 노래였었다. 이듬해인 1958년 까지 자키 클럽에서 노래를 하던 나나 무스꾸리는 우연히 클럽을 방문한 그리스의 유명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를 만나게 된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나나 무스꾸리의 목소리에 깊은 감명을 받은 마노스 하지다키스는 그리스의 시인이자 작사가인 '니코스 가토스(Nikos Gatsos)'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Kapou Iparchi I Agapi Mou'라는 노래를 만들어 나나 무스꾸리에게 주고 1959년의 '그리스 음악 축제(Greek Song Festival)'에 출전시키게 된다.

음악 축제에서 1959년과 1960년에 걸쳐 2년 연속으로 우승한 나나 무스꾸리는 1961년에 그리스의 이야기를 담은 독일 제작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사운드트랙 음반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불렀던 노래가 'White Roses from Athens'였다. 나나 무스꾸리의 'White Roses from Athens'가 담긴 사운드 트랙 음반은 'White Roses from Athens'의 히트와 함께 독일내에서만 백만장이 넘는 판매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62년, 미국 뉴욕으로 온 나나 무스꾸리는 '퀸시 존스(Quincy Jones)'를 만나 재즈 음반 'The Girl From Greece Sings'를 발표하였다. 영국에서는 'My Colouring Book'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음반으로 미국과 영국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나나 무스꾸리는 1963년 부터 모국인 그리스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여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 1963)'의 참여를 시작으로 프랑스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나나 무스꾸리는 1964년에 프랑스에서 개봉한 영화 '쉘부르의 우산(The Umbrellas of Cherbourg)' 주제가를 시작으로 크리스마스 캐럴 곡인 'L'Enfant au Tambour(Carol of the Drum)'를 발표하여 연속으로 히트시켰으며 이때 부터 프랑스의 인기 가수로 서서히 부각하게 된다. 1965년에는 미국의 칼립소(Calypso) 가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와 함께 공연 무대에 올랐으며 두 사람의 합동 무대는 1966년 까지 이어지게 된다.

1967년에 프랑스어로 된 음반 'Le Jour Ou la Colombe'를 발표하여 프랑스 최고의 가수가 된 나나 무스꾸리는 1968년에 영국 'BBC TV'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인 'Presenting Nana Mouskouri'에 출연 후 영어 가사로 된 음반 'Over and Over'를 발표하였다. 1969년에 발표된 음반 'Over And Over'는 음반의 타이틀 곡인 'Over And Over'의 히트와 함께 영국의 앨범 차트에서 거의 2년간 머무르며 꾸준히 팔려나가는 강세를 유지하게 된다.

나나 무스꾸리는 우리나라에서도 'Over And Over'를 비롯하여 'Plaisir d'Amour', 'Try to Remember', 'Amazing Grace'등 수많은 히트 곡을 통해서 들려준 천상의 목소리로 팝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이다. 또한 나나 무스꾸리는 1993년 10월에 '유니세프(UNICEF: 국제 연합 국제 아동 긴급 기금)'의 친선 대사(Goodwill Ambassador)로 임명되었으며 1994년 부터 1999년 까지는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 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음악 외적인 활동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현재 스위스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나나 무스꾸리 (Nana Mouskouri) : 1934년 10월 13일 그리스 그레데(Crete) 출생

갈래 : 팝 소울(Pop), 보컬 팝(Vocal Pop), 프렌치 팝(French Pop), 재즈(Jazz)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nanamouskouri-50.com/site_uk/
Over And Over 감상하기 : http://youtu.be/wzta6hjsYDc

2010년 9월 10일 금요일

Chick Corea - Crystal Silence

 

Chick Corea - Crystal Silence

다양한 건반 악기를 이용한 퓨전 재즈 음악과 실험적인 음악으로 많은 재즈 팬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겸 키보즈 주자인 '칙 코리아'는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첼시(Chelsea)에서 1941년에 태어났다. 본명이 '아만도 앤서니 코리아(Armando Anthony Corea)'인 칙 코리아는 '딕시랜드 재즈(Dixieland Jazz: 뉴올리언스에서 생겨난 초기의 재즈 양식)' 밴드에서 밴드의 리더로 트럼펫(Trumpet)을 연주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재즈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네살때 부터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다.

여덟살 때 부터 정식으로 클래식 피아노 교육을 받기 시작한 미래의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클래식 음악 외에도 자연스럽게 재즈 음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칙 코리아가  어린 시절에 자주 들었던 재즈 음악은 194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비밥(Bebop: 복잡한 멜로디와 하모니가 특징인 빠른 속도의 새로운 음악으로 복잡한 구성의 즉흥 연주가 탄생하는 계기가 됨)' 음악으로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버드 파웰(Bud Powell)',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등의 음악을 들으며 재즈의 기초를 다졌다.

비밥 음악을 들으며 재즈에 눈을 뜬 칙 코리아는 고등학교 시절에 호레이스 실버가 출연하던 재즈 클럽을 드나들며 한층 더 재즈 음악에 빠져들게 된다. '컬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에 입학해서도 음악을 향한 자신의 열정을 버릴 수가 없었던 칙 코리아는 결국 '줄리어드 음악학교(The Juilliard School)'에 입학하여 음악 공부를 하게 되지만 줄리어드의 교육 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이내 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줄리어드 중퇴 후 칙 코리아는 뉴욕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프로 연주자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962년 쯤이었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라틴 음악과 재즈를 결합한 라틴 재즈를 구사하던 '허비 맨(Herbie Mann)', '윌리 보보(Willie Bobo)', '블루 미첼(Blue Mitchell)',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등과 협연하며 재즈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은 칙 코리아는 1966년에 자신의 첫번째 리더작인 'Tones for Joan's Bones'로 데뷔하였다.

1967년 '스탄 게츠(Stan Getz)'의 보조 연주자로 'Sweet Rain' 음반에 참가한 칙 코리아는 1968년 9월에 '허비 핸콕(Herbie Hancock)' 대신에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밴드에 합류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허비 핸콕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1969년 음반 'Filles de Kilimanjaro'에서 '로즈 피아노(Rhodes Piano)'를 담당하며 음반 녹음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건강이 나빠져 음반 녹음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밴드를 탈퇴하게 되었고 그를 대신해 가입한 칙 코리아가 못다 녹음한 두곡에서 일렉트릭 피아노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후 칙 코리아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In a Silent Way(1969년)'와 'Bitches Brew(1970년)'에 참가한 후 자신의 밴드인 '서클(Circle)'을 결성하여 전위 음악에 도전하게 된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역작이며 퓨전 재즈라는 갈래를 탄생시킨 'Bitches Brew'에서의 연주 경험을 바탕으로 프리 재즈 형식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Avant Garde: 전위 음악)' 밴드인 서클을 결성한 칙 코리아는 1971년 까지 서클을 이끌며 몇장의 음반을 발표하였지만 대중들의 외면으로 밴드를 해산시킨 후 1972년에 퓨전 재즈 밴드인 리턴 투 포에버를 결성하게 된다.

서클의 활동을 통해서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함을 깨달은 칙 코리아는 록과 재즈를 결합시킨 퓨전 재즈 음반인 'Return to Forever'를 독일의 재즈 전문 레이블인 'ECM'을 통해서 1972년에 공개하였다. 듣기 편하게 연주하는 방식을 택한 퓨전 재즈로 대중들에게 다가서려는 칙 코리아의 시도로 탄생한 음반 'Return to Forever'는 흔히 쓰는 몽환적이라는 표현이 적당한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 연주가 신비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내며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 내게 된다.
 
밴드의 이름을 사용한 첫번째 트랙 'Return To Forever'는 섬세하지만 몽환적으로 흐르는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피아노를 배경으로 브라질 출신의 보컬리스트 플로라 푸림의 스캣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곡으로 조 파렐의 솔로를 시작으로 각 연주자들의 솔로가 차례로 등장하는 곡이다. 칙 코리아의 투명한 일렉트릭 피아노로 시작하는 두번째 트랙인 'Crystal Silence'는 칙 코리아의 물안개 처럼 흐르는 일렉트릭 피아노와 비상하는 조 파렐의 색소폰이 번갈아 가며 등장하는 멋진 곡으로 특히 조 파렐의 색소폰 소리는 음반 커버에 등장하는 갈매기를 연상시키고 있다. 재즈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곡이다.

플로라 푸림의 보컬이 전면에 등장하는 'What Game Shall We Play Today'는 음반에서 가장 경쾌한 곡으로 조 파렐의 플루트와 플로라 푸림의 조화가 잘 어울리는 곡이다. 음반의 마지막 트랙이며 리턴 투 포에버 멤버들의 호흡이 완벽히 어우러지는 23분 짜리 접속 곡 'Sometime Ago - La Fiesta'는 이 음반에서 가장 빛나는 주요 작품으로 퓨전 재즈의 매력을 느껴볼 수 있는 명곡이며 퓨전 재즈라는 말이 주는 의미를 완벽히 재현하고 있는 곡이다.

리턴 투 포에버 (Return to Forever) :
칙 코리아 (Chick Corea, 일렉트릭 피아노) : 1941년 6월 12일 미국 첼시 출생
스탠리 클락 (Stanley Clarke, 베이스) : 1951년 6월 30일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
플로라 푸림 (Flora Purim, 보컬) : 1962년 3월 6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출생
조 파렐 (Joe Farrell, 색소폰, 플루트) : 1937년 12월 16일 출생, 1986년 1월 10일 사망
에어토 모레라 (Airto Moreira, 드럼) : 1941년 8월 5일 브라질 산타카타리나 출생

갈래 : 재즈(Jazz), 퓨전(Fusion), 포스트 밥(Post-Bop), 아방가르드 재즈(Avant-Garde Jazz)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chickcorea.com/
관련 동영상 감상하기 : http://youtu.be/_un94nAjeO8

2010년 8월 14일 토요일

Joni Mitchell - Both Sides Now

 

Joni Mitchell - Both Sides Now

본명이 '로버타 존 앤더슨(Roberta Joan Anderson)'인 조니 미첼은 캐나다 남부의 앨버타(Alberta)주 남쪽 작은 마을인 포트맥클라우드(Fort Macleod)에서 공군 장교인 아버지와 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계의 모든 강대국들이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시기에 태어난 조니 미첼은 공군 기지가 있는 캐나다 서부의 서스캐처원(Saskatchewan)주 새스커툰(Saskatoon)시에 있는 공군 기지로 발령이 난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성장하게 된다.

가수 겸 작곡가인 동시에 화가이기도 한 조니 미첼은 아홉살때 소아마비에 걸리기도 했으나 완치되었으며 십대에 접어 들면서 부터 '우쿨렐레(Ukulele: 기타와 비슷한 작은 현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일설에 의하면 소아마비로 투병 중이던 아홉살 때 고통을 잊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조니 미첼은 가수로 성공한 이후의 인터뷰에서 그런 사실을 부인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우쿨렐레에서 시작하여 '피터 시거(Pete Seeger)' 같은 포크 가수들의 음악을 듣고 악보를 보며 기타 연주 방법을 습득한 조니 미첼은 또래들의 모닥불 파티 등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고 나중에는 커피하우스 같은 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새스커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조니 미첼은 앨버타주 남부의 캘거리(Calgary)시에 있는 '앨버타 예술 대학교(Alberta College of Art and Design)'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원인 포크 가수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는 어머니에게 토론토(Toronto)로 가서 포크 가수가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와 토론토로 떠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짧은 대학 생활을 마무리 하게 되는데 이때가 1964년 6월이었다. 토론토로 온 조니 미첼은 낮에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길거리 가수로 생활하고 밤에는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 생활을 하면서 지내게 되는데 이 당시 포크 가수 '척 미첼(Chuck Mitchell)'을 만나 교제를 시작하게 된다.

1965년 2월에 조니 미첼은 딸을 출산하였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척 미첼이 아니라 예전 대학 시절의 남자 친구였었다. 딸의 출산 몇주 후 조니 미첼은 사귀던 척 미첼과 결혼을 하였고 이때부터 미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1965년 여름 조니와 척은 미국의 '디트로이트(Detroit)'로 건너가 대학가 주변의 바와 커피하우스에서 듀오로 가수 생활을 하며 조금씩 이름을 알려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캐나다의 'CBC'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포크 가수 '오스카 브랜드(Oscar Brand)'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Let's Sing Out'에 조니 미첼을 출연시키게 된다. 첫 방송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조니 미첼은 1966년 까지 몇차례 더 출연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 나갔다.

1967년 척 미첼과 이혼한 조니 미첼은 음반 데뷔의 꿈을 안고 뉴욕으로 가 포크 클럽과 커피하우스를 무대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부터 조니 미첼은 독창적인 작곡 실력과 혁신적인 기타 연주법으로 많은 주목을 끌게 되면서 가수들에게 곡을 만들어 주게 되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바로 포크 가수 '쥬디 콜린스(Judy Collins)'에게 주었던 'Both Sides Now'였다.

'Both Sides Now'는 쥬디 콜린스가 1967년 10월에 발표했던 음반 'Wildflowers'에 수록되었으며 싱글로도 발매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8위 까지 진출하는 히트를 기록했다. 1968년 '리프라이즈 음반사(Reprise Records)'와 계약한 조니 미첼은 3월에 데뷔 음반 'Song to a Seagull'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그토록 소원하던 조니 미첼의 데뷔 음반에는 포크 가수 '데이비드 크로스비(David Crosby)'가 음반 제작자로 참가하였는데 그는 음반에 수록된 곡 'The Dawntreader'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1969년 5월, 조니 미첼은 자신이 직접 그린 새스커툰 지역을 배경으로 꽃을 들고 있는 자화상을 음반 커버로 사용한 두번째 음반 'Clouds'를 발표하였다. 이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는 쥬디 콜린스에게 주었던 곡 'Both Sides Now'가 수록되어 있는데 새롭게 재해석하여 수록한 'Both Sides Now'는 조니 미첼이 자신만의 보컬 형식을 완전히 정립했다는 평을 받게 만드는 동시에 조니 미첼의 팬들을 사로 잡았던 곡으로 초창기 그녀를 대표하는 곡이다.

조니 미첼 (Joni Mitchell) : 1943년 11월 7일 캐나다 앨버타 출생

갈래 : 포크 록(Folk-Rock), 재즈(Jazz), 포크 재즈(Folk Jazz)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jonimitchell.com/

 

2010년 8월 5일 목요일

Peggy Lee - Fever

 

Peggy Lee - Fever

미국의 노스다코타(North Dakota)주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 태어난 재즈 가수 '페기 리(본명: Norma Dolores Egstrom)'는 철도 회사의 역장으로 근무하던 '마빈 엑스트롬(Marvin Egstrom)'의 여덟 명의 자녀 중에서 일곱번째로 태어났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계 혈통을 가진 페기 리는 네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재혼한 계모의 손에서 자라야 했는데 아버지와 재혼한 계모는 페기 리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기간이 무려 11년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폭력 속에서 성장한 페기 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성인이 된 후에는 비폭력주의자가  되었으며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으로 인해 폭력 행위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힘든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도 그나마 페기 리에게 위안을 주었던 것은 라디오였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의 음악을 들은 후 재즈 음악에 매료되어 재즈 가수의 꿈을 갖게 된다.

계모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페기 리는 열네살이 되던 해에 노스다코타를 가청 지역으로 하는 라디오 방송국 'KOVC'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면서 공식적인 첫 무대를 가지게 된다. 방송 출연 이후 페기 리는 지역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라디오에 고정 출연하게 되었으며 이때  부터 계모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페기 리는 적지만 고정적으로 급여를 받으며 라디오에서 계속 노래를 부르다 노스다코타의 파고(Fargo)시에 위치한 좀더 큰 방송국 'WDAY'으로 옮겨가 출연하게 된다. 'WDAY' 방송국에서 페기 리는 자신의 본명인 '노마 돌로레스 엑스트롬(Norma Dolores Egstrom)' 대신에 페기 리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이름은 당시 'WDAY' 방송국의 한 평론가가 권유한 것이라고 한다.

라디오에 출연하는 한편으로 페기 리는 지역 밴드와 함께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는 가수로써 성공하기 위한 희망 하나를 안고 집을 나와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페기 리의 이 짧은 여행은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고향에 돌아온 페기 리는 예전 처럼 밴드와 함께 클럽 무대에 오르는 생활로 되돌아 가야 했으나 시카고의 한 호텔로 공연을 떠나면서 인생 최대의 기회를 잡게 된다.

시카고 앰배서더 호텔(Ambassador Hotel)의 나이트 클럽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던 페기 리의 모습을 재즈 클라리넷 주자 '베니 굿맨(Benny Goodman)'이 발견하였던 것이다. 당시 베니 굿맨은 자신의 악단에서 노래를 부르던 '헬렌 포레스트(Helen Forrest)'를 대신할 가수를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페기 리의 공연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녀에게 자신의 악단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게 된다.

페기 리는 이렇게 해서 베니 굿맨 악단에 합류하게 되는데 이때가 1941년이었다. 베니 굿맨과 함께 한 이때 부터 페기 리는 가수로써 화려하게 주목받게 되는데 대표적인 곡이 1941년에 발표한 'Somebody Else Is Taking My Place'였다. 이 곡은 빌보드 팝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페기 리를 부각시켰고 인기 가수로 만들어 주게 된다. 1943년 3월에는 베니 굿맨 악단의 기타 주자인 '데이브 바버(Dave Barbour)'와 결혼하였고 6월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 'Stage Door Canteen'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베니 굿맨이 페기 리와 결혼한 데이브 바버를 해고해버리자 두사람은 밴드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이후 페기 리는 음악계에서 은퇴를 하고 딸 '니키(Nicki)'를 키우면서 평범한 가정 주부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가정 주부로 돌아간 2년 동안 페기 리는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 결국 1945년에 캐피털 음반사(Capitol Records)와 계약하고 복귀하게 되는데 그녀의 복귀작은 재즈 가수들의 옴니버스 음반에 수록한 'Waitin' for the Train to Come In'이었다.

빌보드 팝 차트에서 4위 까지 진출하며 페기 리의 식지 않은 인기를 증명한 이 곡 이후 페기 리는 인기 가수의 길을 걸으며 많은 히트 곡을 만들어내었고 절정의 인기를 누리는 인기 가수로써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페기 리가 1958년에 발표하여 빌보드 팝 차트 8위에 올려 놓은 'Fever'는 1956년에 가수 '리틀 윌리 존(Little Willie John)'이 발표하였던 곡을 커버한 것으로 1960년에 발표한 페기 리의 음반 'All Aglow Again!'에 수록되기도 한 페기 리를 대표하는 곡이다.

페기 리가 불렀고 백명이 넘는 많은 가수들에 의해 커버되며 사랑받은 팝의 고전인 'Fever'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팝팬들의 애청 곡이 되었다. 한편 페기 리는 2002년 1월 21일에 지병인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하였다.

페기 리 (Peggy Lee) : 1920년 5월 26일 미국 노스다코타 출생, 2002년 1월 21일 사망

갈래 : 재즈(Jazz), 스윙(Swing), 트래디셔널 팝(Traditional Pop)
공식 웹 사이트 : http://www.peggylee.com/


2009년 8월 17일 월요일

Herbie Hancock - Rockit

 

Herbie Hancock - Rockit

늘 새로운 시도의 음악을 들고 나와 음악 관계자들을 특히 재즈 관계자들을 혼란으로 몰고가는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본명: Herbert Jeffrey Hancock)은 1940년 4월 12일 미국 일리노이 주(Illinois)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허비 행콕은 일곱살 때 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열한살때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Piano Concerto No. 5 를 연주하는 천재성을 보이며 주위의 기대를 모으게 된다.

 

아이오와 주(Iowa)에 위치한 그리넬 대학교(Grinnell College)에 진학하여 전기공학을 전공하였으나 2년만인 1960년에 작곡과 병행하여 학업을 계속하다 1961년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로 돌아오게 된다. 같은 해 트럼펫 연주자 도날드 버드(Donald Byrd)의 권유로 뉴욕으로 간 허비 행콕은 그의 밴드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재즈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62년 블루 노트(Blue Note Records)사와 계약을 하고 솔로 데뷔작 Takin' Off 를 발표하게 된다. 데뷔 음반의 수록 곡 Watermelon Man 은 라틴 재즈 퍼커션 주자인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가 이듬해에 발표한 자신의 음반에 가사를 붙인 버전으로 취입하여 히트를 기록하면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관심을 끌게 된다.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Quintet)에 가입하게 된 허비 행콕은 1968년 까지 총 열여섯장의 음반에 참가하였으며 Miles In The Sky (1968) 음반을 작업하던 중에 마일스 데이비스의 권유로 일렉트릭 피아노를 처음으로 연주하게 되면서 이후 키보드를 바탕으로 한 퓨전 사운드를 시도하게 된다.

 

1969년 퀸텟을 탈퇴하고 워너 브러더스 레코드(Warner Bros. Records)와 계약한 허비 행콕은 빌 코스비가 주연한 TV 드라마 Fat Albert and the Cosby Kids 에 삽입되었던 사운드트랙 음반 Fat Albert Rotunda 을 발표하면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한다.

 

1970년에는 Mwandish 라는 제목의 음반을 통해 절정의 기량으로 다져진 퓨전 재즈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상업적인 성공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성과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허비 행콕은 계속하여 R&B, 펑키 음악들을 도입하여 실험을 거듭했고 이는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며 재즈 펑크(Jazz- Funk)의 전도사로 1970년대의 대중들을 사로잡게 된다.

 

1976년 그룹 V.S.O.P 를 결성하여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 시절의 정통 재즈 음악으로 회귀했던 허비 행콕은 1983년에 발표한 Future Shock 음반의 수록 곡 Rockit 을 통하여 또 다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게 되는데, 당시 힙합 뮤직에 사용되던 스크래치(Scratch) 사운드의 도입등 첨단 테크노 장비를 도입하여 격렬한 댄스 비트가 등장하는 일렉트로닉 팝 뮤직을 선보이게 된다.

 

또한 이 곡은 뮤직 비디오 클립으로도 제작되어 재즈 아티스트로는 사상 처음으로 MTV의 전파를 타면서 1983년 MTV 베스트 뮤직 비디오 클립 중의 하나로 선정되며 또한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리듬 앤 블루스 연주 부문을 수상하게 된다.


 

2009년 7월 9일 목요일

Branford Marsalis - Mo' Better Blues


Branford Marsalis - Mo' Better Blues

재즈계의 명가인 마살리스 가의 장남인 브랜포드마살리스(Branford Marsalis)는 루이지애나 주(Louisiana)의 브로 브리지(Breaux Bridge) 에서 1960년 8월 26일에 태어났다. 음악 교사겸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브랜포드 마살리스를 비롯한 그의 형제들 모두 어린 시절 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라서 음악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브랜포드 마살리스는 어린 시절 처음으로 배운 악기가 피아노였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교내 밴드에 가입해서는 클라리넷을 연주하게 되면서 관악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열다섯살 무렵부터 색소폰을 연주하기 시작한 브랜포드 마살리스는 뉴올리언즈 예술 고등학교(NOCCA, New Orleans Center of Creative Arts)를 거쳐 버클리 음대(Berklee College of Music)에 입학하게 된다.

버클리 음대에 재적 중이던 1980년 여름 브랜포드 마살리스는 아트 블래키(Art Blakey)의 유럽 순회공연에 바리톤 색소폰 주자로 참여하여 프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으며 다음해인 1981년에는 클라크 데리(Clark Terry)와 함께 연주하기도 하였다. 9월에는 알토 색소폰을 들고 아트 블래키의 Jazz Messengers 에 동생인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와 함께 가입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83년 마침내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첫 리더작이자 데뷔 앨범인 Scenes In The City 를 발표하게 되는데 현대적인 분위기의 곡으로 새롭게 해석한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의 곡인 타이틀 곡이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이후 허비 행콕(Herbie Hancock), 스팅(Sting),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등과 함께 활동하며 꾸준히 경력을 쌓아가던 브랜포드 마살리스는 1990년에 스파이크 리(Spike Lee) 감독의 영화 Mo' Better Blues의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을 발표하게 된다.

테너, 알토, 소프라노 색소폰을 자유롭게 연주하는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명성은 영화와 사운드 트랙 음반의 성공으로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지게 되는데 수록곡 가운데 Harlem Blues 와 타이틀 곡이 특히 사랑받았다.




2009년 7월 8일 수요일

Grover Washington Jr. - Just The Two Of Us

Grover Washington Jr. - Just The Two Of Us

퓨전 재즈 색소포니스트(Saxophonist)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Grover Washington Jr.)는 팝적인 요소가 포함된 대중친화적인 감미로운 재즈 연주를 들려주는 대표적인 아티스트 중의 한사람이다. 1943년 12월 12일 뉴욕주 버팔로(Buffalo)에서 태어난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아버지는 오래된 재즈 음악을 수집하는 섹소포니스트 였으며, 어머니는 교회 성가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런 가정 환경은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에게 어린시절 부터 자연스레 음악과 친숙해질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주었다.

열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로 부터 색소폰을 선물 받아 색소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더불어 지역 재즈 클럽들의 뒷문을 들락거리며 라이브로 연주되는 재즈 음악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16세가 되던 1959년,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는 재즈 그룹 포 클래프스(Four Clefs)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1963년까지 포 클래프스에서 활동하던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는 1965년 까지 프리랜서로 세션 활동을 하다 군에 입대하게 된다.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필라델피아에 정착하여 음반 가게를 운영하는 한편 오르간 연주자 찰스 얼랜드(Charles Earland)와 존 하몬드 스미스(Johnny Hammond Smith)의 사이드맨으로 연주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1971년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의 Kudu 레이블에서 녹음 예정이었던 색소포니스트 행크 크로포드(Hank Crawford)의 솔로 앨범이 개인 사정으로 무산되자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는 1971년 9월 데뷔 앨범 Inner City Blues 를 발표하게 된다.

데뷔 음반 발매후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며 명성을 쌓아가던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는 1980년 템플 대학에 등록하여 음악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으로 앨범 Winelight 를 발표하여 빌 위더스(Bill Withers)가 보컬을 담당한 Just The Two Of Us 를 재즈와 팝 차트에 함께 랭크시키며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또한 이 음반은 플래티넘을 기록했으며 1981년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재즈 퍼포먼스 상과 베스트 컨템포러리 재즈 상 2개 부문을 석권하게 된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는 1999년 12월 17일 CBS TV의 The Saturday Early Show 에 출연하여 녹화 도중 갑작스레 찾아온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56세로 사망하였다.

아래 영상은 보컬이 Howard Bomar 입니다.



2009년 5월 30일 토요일

Stanley Clarke - Journey To Love


Stanley Clarke - Journey To Love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자코 패스토리우스(Jaco Pastorius)와 함께 퓨전 재즈 베이스 연주계를 양분했던 재즈-록 그룹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 출신의 베이스 주자 스탠리 클락(Stanley Clarke)은 슬랩(Slap) 주법을 통한 펑키한 베이스 연주가 매력적인 연주자이다.

1951년 6월 30일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스탠리 클락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여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등을 배웠고 열네살 때 필라델피아 뮤직 아카데미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베이스 연주를 시작하게 된다.

1960년대 후반에 클럽가에서 언더그라운드 그룹들과 연주하며 실력을 쌓아나가던 스탠리 클락은 1970년에 이르러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옮겨 아방가르드(Avant-Garde) 재즈 색스폰 주자인 파로아 샌더스(Pharoah sanders)와 함께 연주 활동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길 에반스(Gil Evans), 멜 루이스(Mel Lewis),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스탄 겟츠(Stan Getz), 덱스터 고든(Dexter Gordon), 그리고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와 같은 재즈 명인들과 공연하며 재능을 인정받게 된다.

1972년에는 칙 코리아(Chick Corea)가 이끄는 그룹 리턴 투 포에버에 가입하여 탁월한 연주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스탠리 클락은 그룹 해체시 까지 총 일곱장의 음반에 참여하였으며, 1972년 12월 26일 부터 27일 까지 이틀 동안 녹음한 솔로 데뷔 음반 Children of Forever 를 1973년에 발표하였다.

그룹 결성 초기에 어쿠스틱 베이스 연주를 했던 스탠리 클락은 1973년에 발표한 리턴 투 포에버의 두번째 음반인 Hymn Of Seventh Galaxy 부터 일렉트릭 베이스를 손에 잡게 되며 1974년 부터는 일렉트릭 베이스로 완전히 전향하여 슬랩(Slap) 주법을 통한 펑키한 베이스 연주를 정립한 두번째 음반 Stanley Clarke 을 발표하였다.

이듬해인 1975년에 록 음악과의 접목을 시도한 앨범 Journey To Love 를 발표하였는데 이 앨범은 제프 벡(Jeff Beck, 기타), 존 맥러플린(John McLaughlin, 기타), 조지 듀크(George Duke, 키보드), 스티브 겟(Steve Gadd, 드럼), 데이빗 센서스(David Sancious, 기타)가 참여한 음반이다. 제프 벡은 이 음반에서 Hello Jeff 와 음반의 타이틀 곡인 Journey To Love 에서 인상적인 기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